[유한빈의 시사 칼럼] 홍범도 장군, 고국에 잠들다

독립 유공자의 유해 고국 송환 의미

지난 8월 15일 독립군 카자흐스탄에 묻혀있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7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카자흐스탄과 외교 협상 후 나온 결과이며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홍범도 장군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영화 <봉오동 전투> 등을 통해 알려지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홍범도 정군을 통해 독립을 위해 조국을 떠나 중국과 연해주를 떠돌며 겪어야 했던 고단했던 삶과 북한이 고향인 홍범도 장군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홍범도 장군은 조선 말기 의병장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했으며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청산리 대첩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군과 함께 일본을 대파했다.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독립 활동을 하며 사회주의 영향을 받았다. 1937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여 지냈으며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1 

 

 

해방 직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쉽게 모셔오지 못한 이유는 독립 이후 벌어진 이념 갈등과 한국 전쟁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 카자흐스탄은 소련에 속해 있었으므로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장군의 유해는 고국으로 봉환될 수 없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이 고향인 항일 무장 투쟁의 상징이므로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는 것은 북한의 국가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2  하지만 한국 정부 조사단이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장군 묘소를 조사하고 카자흐스탄 정부와 유해 봉환에 원칙적으로 합의하며 양국의 협력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자 봉환이 추진된 지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2021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안장식이 거행됐다. 카자흐스탄과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보존하기로 합의하고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3 현지 고려인에게 정신적 지주였던 홍범도 장군은 현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그 고려인들의 후손에게 여전히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세워주는 상징적 인물이므로 장군의 묘역이 잘 보존되도록 지속적인 관리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만주, 연해주 일대에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 유공자들이 많이 안장되어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시작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고국으로 모시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위상은 많이 높아져 있다. 이런 국제적 위치에 오르기까지 우리가 잊고 지내는 독립 유공자들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영광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각주

1.(인용 :  https://m.news.nate.com/view/20210821n12132?mid=m03)
2.(인용 : https://news.nate.com/view/20210821n12132)
3.(인용 : https://news.nate.com/view/20210819n0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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