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현의 역사 칼럼] 백성을 구한 정치인, 김육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진정으로 시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심이 든다. 자신들의 잇속 채우기에 바쁜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을 보면 충분히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있음에도 저런식으로 힘을 낭비한다는 일이 안타깝게만 보인다. 권력은 타락하고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미 미 이러한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정치인이 하나 있었다. 바로 김육이다.  

 

김육은 선조 때 태어나서 효종 때까지 공직 생활을 한 조선 시대의 관료였다. 김육의 젊은 시절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김육이 13살이 되던 해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15살일 때는 아버지를 잃고 소년가장이 되었으며 22살에는 어머니마저 잃고 고아가 됐다. 어렵게 들어간 성균관에서는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대북파와 맞서다 대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고 어렵게 익힌 학문이 물거품이 되자 결국 시골에 들어가 살게 된다.1 시골에서의 삶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낳은 아들은 7개월 만에 죽었고, 딸 또한 태어난 지 2년 만에 죽었다. 이렇게 고난이 계속되던 중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정치 상황을 보았을 때 집권 중이었던 세력은 광해군과 이를 지지하던 북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롯한 여러 정책에 불만을 가졌던 나머지 세력은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낸 뒤 새롭게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 때 처벌받았던 김육은 정계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시골로 낙향한 뒤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던 김육은 민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대과에 합격,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민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던 김육은 호패법 완화, 행정구역 재조정 등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김육을 상징할 수 있는 정책은 바로 대동법일 것이다. 낙향한 뒤 공납의 폐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김육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다. 조선 시대에서 백성들은 나라에 조세, 공납, 역을 수행해야 했다. 조세는 쌀을 내는 것이고 공납은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것이며 역은 노동력을 바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공납에서의 폐단이 심각했는데 관리가 특정 상인이 파는 특산물 외에 다른 특산물을 받지 않아서 백성들이 그 상인에게서만 특산물을 사게 만들어 그 상인에게 부를 안겨주고 관리가 사례금을 받는 등의 폐단이 존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산물 대신 토지 1결당 미곡 12두를 걷는 대동법이 발의되지만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고 있었다. 김육은 대동법을 반드시 실행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여러 정치적 반대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대동법을 밀어붙였다. 그의 영향으로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시작되어 충청도, 전라도까지 확산 되어 수많은 백성들을 구하게 된다. 그 후 효종 때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김육은 호남 대동법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며 생을 마감한다.2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허황된 말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정책을 밀고 나가는데 영부사 김육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의 기둥을 잃은 듯하다.”라고 효종이 말하며 5일간 조회를 보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늘 가슴 속에 꿈을 가지고 젊은 시절의 고통에 극복해내어 평생을 백성을 위해 살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던 김육은 가히 조선 시대 최고의 명재상이라 불릴만하다고 생각한다. 늘 약한자들을 위했던 그의 존경스러운 모습을 나도 꼭 본받아야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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