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드림의 사회학 칼럼] 국숫집 사회로의 이행

경쟁 사회를 비판하며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 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1

 

평상이 있는 국숫집은 평범한 사람들이 위로와 교감을 주고받는 장소이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은 국수를 먹으며 마치 오랜만에 친정 오빠를 만난 듯 정다운 표정으로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을 나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작품 속 삼거리 슈퍼 같은 국숫집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시대가 있다. 근대화 시기이다. 물론 독재정권의 억압과 산업화 과정으로 인한 소외 계층 형성이라는 어두운 면을 가진 시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고향’, ‘정’이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마을 소위 민주주의의 꽃이 피었다고 불리는 1987년 이전을 엄밀히 말하자면 문민정부가 탄생한 1993년 이전을 떠올린다. 왜 그렇게 그리던 민주화의 성공이 삭막한 사회의 시작과 시기적으로 맞닿아 있을까? 진정 민주주의가 시민들 사이의 따뜻한 유대감과 반비례 하는 것인가? 나는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에 반대하거나 민주화 이전의 체제로 역행하자는 말은 아니다. 나는 민주화가 어떤 인과관계에 따라 개인주의의 팽배와 사회적 위로의 상실을 낳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작금의 세태를 개선하기 위해선,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기 위해선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상고해보고 싶다.

 

민주화로 인한 독재 체제의 종식은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국가 주도 경제 체제의 종말이자 자유 시장 경쟁 체제의 시작이었다. 시장에 미치는 정부의 영향은 극도로 미약해지고 ‘공정한’ 자본주의의 정신이 사회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근대화 시기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는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었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독재 정권에 영합하는 재벌들에게 이익을 몰아주고, 독재자의 의중에 입각한 경제 개발 정책에 모두가 따라야 했던 시절은 끝나고 모든 참여자가 제약 없이 경쟁하는 자유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개인들과 기업들은 이전과 달리 각자의 이윤 창출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제 활동을 하게 되었고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법적인 한도를 넘나들며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 현상은 분명 대한민국 사회에 경제적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본질적 소외’를 선사했다. 이는 독재 정권 시절 발생한 도태와 소외와는 결이 다른 소외였다. 독재 정권으로 인한 소외의 대표 격인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이 받은 소외와 노동자에 대한 소외는 국가가 주도하는 소외였다. 국가의 폭력적 방법에 따라 정당한 보상 없이 강제 철거되는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은 국가 정책 과정에서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소수’로서 소외되었지만, 그들에겐 서로 힘이 되어주는 마을 공동체가 있었고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기업 편에 선 국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지만 굳게 연대하여 국가의 폭력에 저항함으로써 서로 간의 유대를 공고히 했다. 이런 맥락에서 독재 정권하의 소외는 역설적으로 소외계층 내부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다시 말해, 소외 속에서도 친밀과 결속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민주화 이후 자유 경쟁 체제의 발달은 각자도생, 적자생존의 원리를 사람들 뇌리에 깊게 각인시켰다. 가족만을, 또는 자신만을 위해 나머지의 모든 타자를 경쟁자로 보고 그들을 굴복시키거나 자신이 우위를 점하는 것에 집중하는 개인을 생산해냈다. 이렇게 개개인의 개인주의적, 경쟁주의적 가치관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가 발생했고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본질적 소외’를 유발했다. 지금의 소외가 이전의 소외와 다른 점은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 아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가족 단위의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결속과 유대를 찾아보기 힘든 데다 ‘정부’같이 소외를 유발하는 실체적 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과 달리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연합하여 저항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소외를 유발하는 원인이라 볼 수 있는 ‘경쟁’ 문화는 특정 기관이 아닌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머릿속에 깊게 자리 잡아 있다.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각자도생의 자유 경쟁 체제에서 생존하기 위해 서로 ‘소외하고’ 있다. ‘소외한다’는 표현이 문법적 오류가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애틋한 공감 대신 차가운 시선과 단호한 무시를 건네고 그 결과 구성원 각자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소외당하는, 모두가 서로의 소외의 원인이 되는 ‘본질적 소외’에 기여하는 현실은 ‘소외한다’는 능동적인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민주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적 소외가 민주주의 자체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의 본래 취지와는 상관없지만 민주화로 인해 발생한 것은 분명한 ‘다분히 공정한 자유 경쟁 체제’가 본질적 소외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경쟁 풍토는 필연적으로 승자 독식과 부의 대물림, 엘리트의 합법적 세습을 불러오게 되어있으며 글의 중반에서도 말했듯이 개인주의적 이기심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본질적 소외의 해결책은 ‘평상과 국수, 푸조나무의 회복’과 ‘본래적 자본주의 정신’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사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수평적 공간이자 열린 공간인 ‘평상’이 사라지고 줄 세우기 문화로 가득 찬 수직적 공간만 남아있으며 일상적이고 소박한 문화가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있고, 모든 이의 그늘막이 되어주는 ‘푸조나무’ 역할을 수행할 공동체가 부재한다. 이제는 서로를 향한 경쟁의 눈빛을 거둬들이고 가끔은 서로 마주 앉아 속 깊은 이야기를 터놓는 평상을 재건해야 한다. 정겨운 고향을 회상하게 하는 소박한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모두의 푸조나무가 되어주는, 구성원들에게 그늘을 선사해주는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독재정권의 억압 속에서 생성된 과거의 평상과 푸조나무보다 지금의 민주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생성된, 휴머니즘과 연대 의식을 기반으로 한 평상과 푸조나무는 훨씬 더 질 높은 공간이 될 것이다.

 

또한 본래적 자본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직업이 신께서 부여한 소명직이며 '직업적 성공 = 구원의 징표'이고 우리 모두는 열심히 근로하여 많은 부를 축적함으로써 신의 영광 실현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토대로 발전된 것이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참고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막스베버) 자본주의의 본질은 많은 부를 창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얻은 부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거나 사회에 재투자하는 것에 있다. 부를 모으는 목적이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익 실현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전의 우리 사회에 존재한 '개인이 국가의 소속원으로서 투철한 애국정신을 가지고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을 대체한 것은 인류애를 바탕으로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진정한 민주 이념이 아니라 각자의 사리사욕만 채우고자 하는 천민 자본주의였고 이는 사람들 간의 소외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럼 어떻게 우리 사회에 수평적 공간을 마련하고, 그늘을 조성하고 본래적 자본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나는 교육제도의 대대적, 혁신적, 급진적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기성 사회에 경쟁의 문화가 가득한 상황인 지금, 교육이 바뀌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화가 실현될 수 없다. 교육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평가’제도 이다. 협동, 민주시민, 인류애, 배려, 공감을 강조한 좋은 교육 커리큘럼이 있어도 ‘평가’, ‘등수 매기기’가 없어지지 않는 한 ‘경쟁’주의적 사고방식은 사라질 수 없다. 성적을 기준으로 한 입시제도는 대학의 서열화와 학력 차별 같은 ‘공정’하지만 ‘불평등’한 능력주의적 문화를 지속시키고 있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평가제도가 없고 모든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으며 누구나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한 후 일정한 교육과정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김으로써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평가제도의 소멸이 학생들의 학업 수준 하락을 유발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에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대부분의 우리들 편견이 무색하게도 독일은 평가제도의 폐지를 통해 초중고에 경쟁의 문화 대신 협력의 문화를 조성할 수 있었고 학력 수준도 시험과 평가가 가득한 우리나라에 비해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순수 학문 분야에서 무기 제조 분야까지 많은 분야에서 여전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2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나라엔 정치적 민주화를 제외하면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일제강점기와 전체주의 시기의 경쟁풍토는 민주화 이후의 자유 시장 체제의 확산과 맞물려 각자도생의 극단적 경쟁풍토로까지 발전되었다. 이 악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선 큰 결단이 필요하다. 평가제도라는 악습을 철폐하고 능력 중심의 경쟁 사회에서 협동과 연대, 위로와 공감이 있는 인격/ 존엄 중심적 교육제도를 통해 평상 위, 푸조나무 아래에서 국수를 먹으며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을 나누는, 진정한 민주적 사회로 다 함께 나아갈 때이다.

 

각주

1.인용 : 평상이 있는 국숫집 (문태준) - <가재미>(문학과지성사,2006,72쪽)
2.참고 : https://www.youtube.com/watch?v=HpgNDjc_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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