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영의 영화 칼럼 XV] 어른이 되지 못한'거꾸로 피터팬', 칠드런 액트

이번 칼럼에서는 영화 ‘칠드런 액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칠드런 액트는 종교, 부모, 그리고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소년이 섞여 다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다.

 

 

 종교의 교리에 따라 치료를 거부하는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애덤으로,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이지만 애덤과 그의 부모 모두 완강하게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병원 측에서는 아동법을 준수하기 위해 법원에 치료 허가를 요청하고, 애덤을 직접 만나고 온 판사 피오나는 병원 측의 요구를 허용한다.  피오나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 애덤은 그녀에게 의존하며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다.
다시 발생한 병으로 인해 그는 다시 한번 생사에 갈림길에 서지만 ‘진정한 자유’를 위해 치료를 거부한다. 피오나는 그를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성인이 된 애덤을 강제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칠드런 액트> 가 담고 있는 주제는 너무나 다양하다. 특히나 '종교' 가 어느 영역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 라는 무겁고도 심오한 내용까지 다루지만 오늘의 칼럼에서는 "어른"의 기준에 관해 논해보려 한다.  3개월 전에는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던 것과 달리 이후 법적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애덤은 선택에 따라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3개월의 시간이 바꾼 것은 애덤의 법적인 분류일뿐, 그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피터 팬 증후군이라는 심리적 증상이 있다. 어른이 되지 않는 세계 네버랜드에서 친구들과 해적을 무찌르고 어린 시절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피터 팬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고 싶어 하는 사고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성숙해지는 것에서 도망쳐 꿈의 나라로 숨어든 피터 팬과 반대로, 애덤은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갈망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확고한 자신만의 규칙이 있었고, 한 번 선택한 일은 절대로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이 애덤의 신념이었고 그가 생각하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애덤은 결코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는 거꾸로 된 피터 팬이었다.

 

진정한 어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이는 없다. 사실,  "진정한 어른"의 표본도 없다. 나이가 차면 성인으로 분류될 테지만, 여전히 사회에는 20살 피터 팬, 50살 애덤 등 "어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한 이들이 태반이다. 아마 그들 모두에게는 어른이 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준비 시간이 부족했다. 그 결과  피터팬은 어른이 된 이후 자신에게 닥칠 압박감이 두려워 도망쳤고, 애덤은 일그러진 이상향을 좇았다. 피터 팬은 자신의 친구, 친구의 후손, 후손의 후손이 정해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고 책임감을 배우는 과정을 가질 수 없었고, 애덤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제때 어른이 되지 못한 피터 팬도,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애덤도 모두 자신만의 어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덤이 가진 어른의 이미지란 하나의 망상에 가까웠다. 병상에 묶여 일상을 잘 누리지 못했던 그가 처음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자유, 그것이 "어른" 이었고 과도한 집착으로  변질된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시간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 테지만, 나의 정신 또한 이를 천천히 받아들여야 한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방식도 그만큼의 성숙도를 잘 녹여내야 한다.  다가오는 여름 방학, "칠드런 액트"를 보며 자신만의 어른이 무엇인지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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