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영의 음악 칼럼 I] "Modern life is rubbish"로 듣는 브릿팝 전쟁

한국 음악 - 케이팝이 점차 서양 음악 차트에 진입하고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 흐름이 과연 얼마나 길게 이어질까? 일부 연령의 대중에게서만 인기를 끄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2030년은 케이팝이 지배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음악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은 없지만,  꼭 알아둬야 하는 것이 있다.  90년대 세계 문화를 이끌었던 음악 역사 '브릿팝' 말이다.

 

 

강렬한 기타 연주와 "우후-" 를 외치는 도입부로 시작하는 노래 'song2' 를 아는가? 혹은, 기침 소리로 시작을 알리는 노래 'Wonderwall' 은? 둘 다 한 번쯤 들어봤다면,  당신은 이미 브릿팝의 최전성기를 맛본 것과 다름없다. 사실, 브릿팝에 속하는 밴드들 그 자체는 "브릿팝"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명성과 큰 수입을 얻을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브릿팝은 사실 국가적인 사업과 다름없었기에 많은 압박감과 관심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60년대 세계적으로 커다란 붐을 일으켰던 비틀즈, 롤링 스톤즈 이후 미국 음악에 완전히 밀려나 있었기에 음악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마침 미국의 음악에 대항하여 나왔던 밴드들을 묶어 브릿팝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물론 음악적으로 뛰어난 밴드들이었지만 더욱 더 명성을 크게 얻었어야 했기에 언론에서는 종종 과도할 정도로 그들의 싸움을 부추겼고, 술과 약에 취해있던 가수들의 잦은 말실수는 더 큰 싸움으로 번졌다.

 

특히나 밴드 블러 (Blur)와 오아시스 (Oasis)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을 뿐 아니라 밴드를 구성하는 멤버들의 출신 성분이 워낙 달랐기에 계층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다. 중산층 집안 자녀 출신인 블러와, 맨체스터에 기반을 둔 노동 계급 자녀 오아시스의 대결 구도는 영국 국민에게 지역감정을 느끼게 하였고  이는 점차 브릿팝 전쟁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블러의 멤버들은 해당 이미지에 대해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아시스가 '쿨하고 진보적인 젊은이' 이미지인 것에 비해 중산층 이미지인 블러 멤버들은 '중산층' 의 고착화된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로 인해 많은 조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남북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들 모두에게 상처를 남길 만한 사건이 너무나 다분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브릿팝 밴드의 음악을 듣고, 영국적인 색채를 느낀다.  광고 음악이나 운동선수 등장 음악에 쓰일 정도로 사랑받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개입됐던 산업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당시 영국의 노동당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오아시스와 블러의 프론트맨 리암 갤러거와 데이먼 알반과 친분을 쌓으려 시도하며 좋은 이미지를 쌓아 나갔지만 이후 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했다고 분개하며 그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낸다. 

 

90년대에는 미국 밴드 너바나 (Nirvana)의 그런지 음악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고, 영국 문화를 퍼뜨리겠다며 블러는 영국적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를 발매한다. (블러는  점차 과열되어 가는 양상에 환멸을 느끼며 브릿팝의 죽음을 선언한 뒤 그런지 음악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등장 자체가 애국적인 성향을 띄고 있으나 이들의 행보가 영국이 다시 한번 번영하는 데 큰 도움을 끼칠 거라 믿은 언론과 정부에 의해 완전히 국수주의로 변해버릴 뻔한 셈이다. 

 

케이팝 그룹들은 종종 한국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들 역시 한복을 입거나 김치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앞장 서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의 문화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은 좋다.  그러나 케이팝 시장이 확장될수록, 우리는 그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한국만을 위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잊곤 한다. 아직까지 "한국" 이 가진 세계로 통하는 열쇠가 몇 가지 안 되기 때문에 그 중 하나에 집착하게 될 수도 있다. 마치 세계적 명성을 되찾기 위해 경쟁을 부추겼던 영국처럼 말이다. 우리는 브릿팝의 아픈 부분을 기억하며 케이팝의 선두에 선 그룹에 과도한 기대를 건다거나, 지나친 언론 플레이를 하는 등의 엇나간 애국심은 오히려 역풍을 빚어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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