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종의 독서 칼럼]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장면, 나만 불편한가요?>를 읽고, 대항 표현이 필요한 시대

세계 인권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인류·가족·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그들의 평등하고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할 때,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화적인 세상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1그렇지만 현실은 그렇게 까지 낭만적이지 않다. 인권이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고, 미디어는 현실의 인식을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반영한다. 이 책, <이 장면, 나만 불편한가요?>는 이런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를 다루는 미디어의 시선을 폭로하고 있다. 성별과 경제적 부, 성적 지향과 정체성, 인종 등에 대해서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어떻게 사람들을 그려 왔는지에 대해서 여러 예시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일상과 매체 속 혐오 표현에 대항하는 방법으로는 '대항 표현'이 있다. 대항 표현이란 "혐오표현을 논박하고 약화하는 맞받아치기, 되받아쳐서 말하기"2라고 할 수 있다. 거창한게 아니라, 일상 속의 담론에서도 쉽게 실천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홍콩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태도에 대해서 '짱깨'니 '중공'이니 같은 혐오 표현으로 공격하는 대신에 'Stand With Hong Kong'같은 대항 표현으로 홍콩 민중과 연대하는 방법도 있다. 조두순같은 성범죄자들에게 '죽어도 좋은' 사람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대신 피해자들과 진심으로 연대하고 추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촌역에 걸렸던, "성 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3라던 한 광고가 더욱 의미 있는 균열로 다가오는 것이다.

 

1869년, 코만치의 족장 토사위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했던 필립 셰리던을 만났을 때 "나 토사위, 나 좋은 인디언"이라고 서툰 영어로 말했다. 셰리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모두 죽어 있었다."4셰리던이 왜 '살아 있는' 좋은 인디언을 보지 못했는지 단번에 추측할 수 있는 일화이자, 동시에 혐오 표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항 표현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혐오를 혐오로 되받아칠 필요도 없다. 미디어 속의 차별적 표현에 대항하는 방법은 불매 운동같은 것만이 있는게 아니다.  기존의 매체를 인위적으로 교정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발표된 디즈니의 <인어 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고전적인 명작이다. 이 영화에는 당연히 '인종 차별적' 분위기가 드러나는데, 영화 자체가 남북 전쟁 이후 황폐화되어 가는 남부 지역의 농촌을 그려내며 당시 백인들의 시선을 훌륭하게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트리밍 서비스에 유지하여 관객들이 그런 시선을 신선한 충격으로 접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인어 공주> 실사판도 그러하다. 원작을 재현하는 영화에 자의적인 설정 (이를테면 주인공의 인종을 바꾼다던가)이 들어가면 관객들은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매체가 다뤄야 하는 담론도 늘어난다. '디즈니' 영화가 고전 명작에 '차별'이라는 현대적인 소재를 덧붙여 현대 상업 영화의 시선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결국에는 대중의 기대를 받는 영화에 인종이라는 소재를 끼워서 파는 꼴이 된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영화 <피치 퍼펙트>와 <인어 공주>가 비판받지만 <그린 북>과 <히든 피거스>를 향한 극찬을 받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피치 퍼펙트>에도 사회적 약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스토리의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린 북>은 흑인 남성과 백인 남성의 우정, 그리고 <히든 피거스>는 흑인 여성들의 치열한 삶을 통해서 인종 문제를 제대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 극찬을 받을만한 것이다. 이는 대항 표현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실천하고 연대하는 것, 이것이 사회 운동이 지향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성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밖히기 전에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명한 장면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때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눠 가졌습니다.'5

 

예수는 자신의 속옷을 나누어 가지는 와중에도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청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도 이를 닮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 모두가 예수처럼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마음가짐은 조금 닮아야 하지 않을까. 특정 집단을 모두 혐오 집단으로 규정한 뒤 정체성을 내세운 정치를 하거나, 일반화하는 대신에 그들의 무지를 용서하고, 혐오에 대항하는 대항 표현으로 맞설 필요가 있다. 

 

각주

1 인용: https://amnesty.or.kr/resource/세계인권선언/?gclid=CjwKCAjwieuGBhAsEiwA1Ly_nanTCXt92W6Mxthl6gzHsTDv69rH3fsAzpFZpz6RXi9UglCsf_gjuhoCb0AQAvD_BwE

인용: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676963

참고: https://www.yna.co.kr/view/AKR20200902095700004

참고: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40403/62221117/1

인용: http://www.holybible.or.kr/B_GAE/cgi/biblesrch.php?VR=GAE&QR=%B4%AA+23%3A34&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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