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빈의 독서 칼럼] 정의의 가변성, 앵무새 죽이기

다수결의 원칙, 항상 정의로운가?

'다수결의 원칙', 다수가 원하는 것에 따라 소수의 의견을 배제하고 다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결정을 할 때 흔히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 사실, 다수결의 원칙을 사용하지 않고 소수의 의견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하나하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더 좋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비효율적이라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을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다수결의 원칙이 선택에 있어서 항상 정당하고 정의로울까?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통해 정의의 가변성과 정의로운 사회, 정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6살 여자아이, '스카웃'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스카웃의 가족이 사는 메이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끼리 상당히 끈끈한 관계에 놓여 있고 모두가 친하게 지내며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단 한 사람, '부 래들리' 아저씨만 빼고, 말이다. 래들리 아저씨는 메이콤 마을 사람들과 유일하게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는 마을 주민으로, 그 사람의 집 주변에 가게 되면 죽게 된다는 유언비어들이 가득했다. 스카웃과 그녀의 오빠 젬, 그리고 이들의 친구 딜은 래들리 아저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계속해서 래들리 아저씨의 생활을 훔쳐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다 이들은 래들리 아저씨 집 주변에 놓여 있는 자신들을 위한 선물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무서워하며 래들리 아저씨를 더 괴롭히지 않았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 애티커스 변호사는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흑인, 톰을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이 때문에 스카웃은 학교에서 '깜둥이를 변호하는 아빠를 둔 애'로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애티커스 변호사는 인종주의가 가득한 사회에서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톰의 변호를 계속한다. 애티커스 변호사가 진범이 톰이 아닌 피해자의 아버지임을 밝혔지만, 백인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이 톰을 무죄로 놓아줄 리가 없었다. 결국, 톰은 누명을 쓰고 재판에서 지게 되며 애티커스 변호사는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원망을 받게 된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애티커스 변호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자녀들인 스카웃과 젬을 괴롭히지만, 각종 나쁜 유언비어에 휩싸인 부 래들리 아저씨가 이들을 구해주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나는 이 책에서 톰의 재판에 중점을 두고 싶다. 톰이 누명을 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톰에게 유죄 선언을 했기 때문에 톰은 누명을 벗지 못한다. 이 사례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당시 인종주의의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하였을 때 배심원을 백인으로 구성한 것부터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다수의 배심원이 톰을 유죄로 지목했다고 해서 톰을 처벌하면 안 된다. 따라서, 이 사례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부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정의로운 선택의 기준은 가변성이 있으며 그때그때 사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정당한 판결을 위해서 최대한 공정한 배심원을 선정하고 투명한 수사를 하여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제목, '앵무새 죽이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앵무새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애티커스 변호사의 말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우리 사회가 앵무새를 죽이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로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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