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민의 언론 칼럼1] 사회적 타살과 언론의 순기능

변희수 하사 사망 사건, 언론의 문제점은 없었나

분명히 스스로 택한 죽음. 그러나 이를 ‘자살’ 대신 ‘사회적 타살’이라 칭하기도 한다.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에 따라 발생한 안타까운 ‘자살’을 어떻게 ‘타살’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사회적 타살이라고 입을 모아 말할 때의 기준은 나름 명확하다. 바로 사회 구조 속 ‘차별과 편견’이 개인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경우다.1 이러한 사회적 타살과 ‘언론’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언론은 차별과 편견에 대한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사회가 이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혹은 막아야 할까, 아니면 더 부추겨야 할까? 답은 명확한데도 언론이 사회적 타살을 야기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사례를 들여다보자.

 

 

필자는 트랜스젠더 군인이었던 변희수 하사가 올해 3월 3일,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변희수 전 하사는 2017년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수행하다 2020년 말,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기를 원해 성전환수술을 받았다. 그는 여군으로서 복무를 계속하겠다고 했으나 육군은 장애 판정을 내리고, 강제 전역을 결정한 후 재심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2 또 성 소수자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부정적 시선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많은 인권 단체들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의 죽음은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한다. 성별 정체성을 떠나 훌륭한 군인이 되고자 했던 한 개인을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차별에 맞서고 소수자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은 누구일까. 사회적 타살의 전형을 바라보며 차별과 편견, 그리고 소수자 혐오의 심각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 역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 성 소수자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언론 보도만 이어졌다. 물론 모든 언론이 소극적 보도만 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성 소수자에 관한 내용은 언급조차 없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성 소수자는 관심을 끌기 위한 화제성 주제로 사용되었다. 성 소수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처럼,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차별과 편견은 강화되고, 성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3

 

 

그렇다면 원래 언론의 순기능은 무엇일까. 언론인을 희망하는 필자가 평소 생각해 보았을 때, 언론은 있는 그대로를 보도할 수 있어야 하고, 모두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비단 성 소수자 뿐 아니라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국내 언론은 너무 소극적이다. 축소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입을 닫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그 사실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 언론이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사회가 논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전하는 것이 언론의 기능 아닌가. 이제는 잊어버린 그 역할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각주

1.참고: https://www.yna.co.kr/view/AKR20210305078651005?input=1195m
2.참고: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5309.html
3.참고: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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