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이의 독서 칼럼] 개인인가, 전체인가

야간 비행을 읽고

최근 우리나라의 대명절인 설날 연휴를 지내면서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관한 뉴스가 지속해서 나왔다. 아무래도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설 명절에는 편하게 가족을 못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줄어든 상황에서 특별한 날에 가족을 만나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또 없겠지만, 오히려 이럴 때 그런 마음을 배제하고 '국가'를 위해 참아야 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국가를 위한 개개인의 삶의 희생이 요구되는 지금에 이르러 개인의 자유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어디까지 제한되어야 하는지 문득 고민하게 된다. 개인과 국가, 다시 말해 개인과 전체 간의 우선순위를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이와 유사한 사례를 한 소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버지와 함께 탑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비행 장비를 만들어 탈출하던 날, 호기심에 새파란 하늘로 치솟던 인간의 모습은 과거부터 꿈꿨던 비행의 소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필자 또한 어린 시절 커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 그 누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생텍쥐페리는 대단하다. 실제 비행기 조종 이력을 바탕으로 '야간 비행'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적인 비행의 이면에는 생사를 오가는 여정이 숨겨져 있다.

 

 

주인공 '파비앵'은 우편기를 조종하는 비행사이다. 그와 같은 비행사들은 항로 전체 책임자 '리비에르'의 엄한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다. '리비에르'의 엄한 규칙에는 이유가 있는데, 제시간에 출발하고 제시간에 도착하는 상황이 이루어져야 비행사들의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사고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날 평소처럼 업무를 위해 '파비앵'은 피타고니아선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우편기를 조종한다. 이것이 정시에 도착하기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는 것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독자는 알게 된다. 밤하늘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만끽할 수 있는 정복감에 싸여있는 것도 잠시, 그에게 자연의 무자비한 공격이 찾아온다. 이 상황은 곧 연락망을 통해 항공사로 알려지고, '파비앵'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초조함이 느껴진다. 그런 그를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이다. 그가 평상시라면 정상적으로 찾아올 예정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도시에서, 애타는 가슴을 안고 남편을 기다린다. '파비앵'은 필사적으로 폭풍과 사투를 벌여 잠시나마 시간을 벌지만, 그의 항공편은 이내 연락이 끊기고 만다. 망연한 기운이 자리 잡은 사내 풍경을 보면서도, '리비에르'는 이내 다음 업무 지시를 내린다.

 

누군가 '리비에르'를 보며 냉혈한이라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연락이 끊어진 비행사를 놔두고 슬픔에 빠질 틈이 없이 바로 다음 업무를 지시하는 그의 모습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부적절한 조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항공사의 업무는 '파비앵'의 비행 한 번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말고도 다른 비행사들이 시시각각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밤의 비행'을 이겨낼 용기를 다지고 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다고 하여 모든 업무의 지휘를 중단한다면 '파비앵' 외에 또 다른 사상자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리비에르'는 현 상황에서 기상을 다시 점검하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다음 예정된 우편기에 이륙 명령을 내렸다. 한 사람의 희생을 안타까워했지만, 그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작가는 무거운 승리자로 표현했다.

 

 

"인생에는 해결책이 없어. 다만, 추진력이 있는 거야.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야. 그러면 해결책은 뒤따라오는 법이네." - 리비에르

 

윤리 시간에 배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러분은 개인을 위한 전체와 전체를 위한 개인,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질문을 바꿔서, 어느 쪽을 더 추구하는가? 전자는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고 후자는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고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일정한 희생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 개념을 소설에서 비추어 볼 때, '파비앵'의 사례는 전체를 위한 개인에 해당한다. 이 사고는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멈추는 일이 없이 회사 '전체'를 위해 다시 일상을 선택했다. 반면 회사에서의 일상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일상은 파괴되는데, 그 경우가 '파비앵'과 그의 아내의 사례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비행하던 '파비앵'은 가족에게 되돌아갈 수 없었고, 결국 그 자신의 행복을 지키지 못하고 밤하늘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리비에르'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고민한다. 자신이 내리는 판단이 옳은 것인지, 그렇게 무정하게 대하는 것이 안전을 지키는 일인지, 아니면 이 모든 행위가 잘못된 것인지를 말이다. 비행기 조립으로 오랜 시간 일했던 노인을 내쫓아야 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은 '리비에르'가 적어도 생명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비인간적인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만일 '파비앵'의 사고를 겪고 감정적으로 업무를 중단하여 남은 우편기의 일정에까지 차질을 빚었다면, 그 일로 인해 또 다른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회로는 멈추는 일 없이 돌아간다. 우리도 살아가며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개인과 전체 중에서 어느 쪽으로 비중을 실을지는 철저히 자신의 판단에 따른다. 다만 그러한 희생을 무시하거나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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