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이의 독서 칼럼]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원미동 사람들'

타인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필요한 때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작품의 이름을 발견할 때 느끼는 설렘과 반가움을 독자들 또한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심화 국어 교과에서 양귀자 작가의 '한계령'을 잠시 배웠을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유명한 연작 소설의 동일 작가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원미동 시인'이라는 단편 수록집에서 처음 알았다. <원미동 사람들>은 필자가 중학교 국어 시간 때 공부했던 소설로 '원미동'이라는 공간을 두고 벌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유쾌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형제 슈퍼'를 차리고 주민들에게 싹싹하게 굴었던 '김 반장'의 모습이 떠오르자 망설임 없이 도서를 선택했다.  

 

 

책에는 11편으로 이루어진 <원미동 사람들> 이야기 중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첫 번째 이야기가 '원미동 시인'이다. 이 이야기에서 짐짓 자신이 어른들의 모든 것을 꿰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 '경옥'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경옥'은 자신에게 관심이 거의 없는 집안을 뒤로하고 바깥에 자주 나가는데 학교도 다니지 않는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가 '김 반장'이다. 가끔 길을 둘러보면 꾀죄죄한 차림의 한 청년이 있는데, 그는 '몽달 씨'로 속칭 원미동의 시인이다. 사람들은 대학교에서 잘리고 군대에 다녀온 뒤로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이라 못 박으며 수군거리지만, 이에 개의치 않는 '몽달 씨'는 '경옥'과 '김 반장'의 옆에서 온종일 시구를 외워서 읊는다. 사건은 어느 날 밤 '경옥'이 집을 나와 형제 슈퍼 근처 의자에서 잠이 들었을 때 일어난다. '경옥'은 빨간 셔츠의 남성이 '몽달 씨'에게 사정없이 주먹을 날리는 장면을 본다. '몽달 씨'는 도망치기 위해 형제 슈퍼의 '김 반장'을 찾아가지만, '김 반장'은 그런 '몽달 씨'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쫓아내 버린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경옥'은 충격에 빠진다. 그녀는 빠르게 달려가서 지물포 '주 씨'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내 마을 사람들 여럿과 지물포 '주 씨'가 현장에 도착하며 상황은 일시적으로 끝난다.

 

'경옥'이 그날 밤에 본 광경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평소에 시만 읊고 웃으며 지냈던 '몽달 씨'가 왜 폭행을 당해야 했는지, 그리고 평소에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했던 '김 반장'이 '몽달 씨'를 모른 척했는지, 어린 나이지만 '김 반장'의 무관심과 외면을 결명했을 것이다. 글을 읽어나가는 필자 또한 같은 대목에서 '경옥'과 같은 생각이 들었고 이내 분노가 솟았다. 매일 싹싹하게 주변사람을 대하며 자신의 선함을 아낌없이 내보이던 사람이 위험에 처한 이웃 사람을 보자 돌변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모이고 나서야 '몽달 씨'의 편을 드는 그의 모습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경옥은 김 반장이 건네는 '쭈쭈바'나 '요구르트'와 같은 간식을 일절 받지 않았고, 되도록 그 주변으로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평소 행동과는 아주 다른,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김 반장'에 대한 정이 뚝 떨어졌다. 비열한 인간이라며 속으로 여러 번 비난을 날렸다. 이야기를 읽고 나서 김 반장의 행동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필자는 김 반장의 행동을 필히 '악'으로 규정하고 몽달 씨를 외면한 그의 냉혹한 모습에 상당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상황을 곱씹어 보면서 그의 행동을 무조건 탓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대 사회는 독재 권력의 횡포가 자행되던 1980년대이다. '몽달 씨'와 같이 '어떤 이유'로 인해 대학교에서 퇴학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쉬쉬되었던 것이다. 그때와 달리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필자로서 당대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그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었다. 누가 보기에도 분명하게 잘못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와중에 반기를 들며 용감히 나서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매정해 보여도 가장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물포 '주 씨'처럼 타인을 돕기 위해 서슴없이 나서는 인물도 있지 않았는가.

 

몇 년 전, 필자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평소처럼 가만히 서서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자 주변 사람들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때 왼쪽에서 어떤 물건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모자로 추정되는 물체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물건의 주인은 자신의 물건이 떨어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건너가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고민에 빠졌다. 물건이 떨어진 자리로 다시 뛰어가서 주인에게  가져다 줄 것인지, 아니면 다른 행인들처럼 모르는 척 지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이 신호등 불은 벌써 깜빡이고 있었다. 결국 필자는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 또한 그 장면을 목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2020년을 마스크와 함께 사투를 벌인 세상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한 일상 속에서 조금이나마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을 위해 인간의 온정을 나누고 희망을 품어야 할 때가 아닐까. '원미동 사람들'의 삶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 작가처럼 가끔은 천천히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면 한다. 누군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볼 수도 있고, 많이 내린 눈에 곤란해하는 경비아저씨와 마주칠 수도 있다. 손을 뻗어 손수건을 주워 건네고, 빗자루를 들고 집 앞의 눈을 쓸며 지풀포 '주 씨'를 떠올려보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들인다면, 그 시간이 모여 각박한 사회를 이겨나갈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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