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나의 독서 칼럼] 서울, 1964년 겨울 속의 절규

고독과 소외는 우리를 망가지게 한다.

 

살면서 소외감을 느낀 적 있는가? 있다면 언제 소외감을 느껴봤는가? 우리 청소년들을 예로 들자면, 소위 말하는 ‘왕따’ 같은 문제가 예가 될 것이고 조금 더 넓은 사회로 나아가면 직장 내 따돌림 정도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외는 단순히 따돌림의 문제만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소외라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고, 정체성을 잃어버려서 자신이 마치 어떤 물건이나 수단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또한 느끼게 된다. 때문에,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외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사람들은 자신이 돈 버는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 아닌지 생각하고 깊은 소외감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한 후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었다. 농촌 공동체는 파괴되고 서울은 거대도시로 변해 갔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모두에게 심지어 자신에게마저 익명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김승옥 작가의 작품인 「서울, 1964년 겨울」은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공동체 붕괴를 잘 나타내고 있는 소설 중 하나이다. 작품의 배경부터 살펴보자면, 제목에 나와 있듯이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서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등장인물은 총 세 명으로 나, 안, 30대의 사내이다. 세 사람의 이름은 모두 이니셜로 나오고 있는데 이는 아까 언급한 현대사회의 익명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정체성 상실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구청에서 근무하는 '나'는 선술집에서 대학원생 '안'을 만나고, 이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서던 중 어떤 사내가 그들과 동행하기를 청한다. 눈동자에 희망과 기운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내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사면서, 자신은 서적 판매원이며 오늘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가 급성 뇌막염으로 죽었고 자신은 아내의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 결국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또한, 사내는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며 아내를 팔아 번 돈을 다 쓸 때까지 자신과 동행해 줄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소방차가 지나갔고, 셋은 불구경을 하자는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소방차의 뒤를 따라간다. 여기서 사내는 불길을 보며 그 속에서 팔아넘긴 그의 아내가 타고 있는 듯한 슬픈 환각에 사로잡힌다. 곧이어 남은 돈을 손수건에 싸서 불 속에 던져 버린다. '나'와 '안'은 돌아가려 했지만 사내는 혼자 있기가 두렵다며 같이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결국, 셋은 여관에 가는데, 사내는 같은 방에 머물기를 바랐지만 '안'의 고집으로 셋은 각자 다른 방에 투숙한다. 다음 날 아침 사내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안'은 사내가 그날 밤 죽을 것을 예상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그를 혼자 두는 것이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줄 알았다며 변명한다. 그러면서 '나'와 '안'은 사내의 죽음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서둘러 여관을 빠져나오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1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를 팔아 버린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덫에 걸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다. 돈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내의 모습을 통해 돈이면 뭐든 된다는,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많이 벌어들일 수 있다면 허용된다는 현대인의 끔찍했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심리적으로 위태로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행하기 부담스러웠던 나와 안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사내는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방은 벽이라는 단절된 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기에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도록 하는 장치, 사람들 사이의 합일을 가로막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내를 무참히 외면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안과 나의 모습을 통해서 타인의 삶과 자신을 무관하게 여기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내의 죽음은 돈을 추구하면 할수록 소외와 고독, 죄책감에 시달려 쓸쓸하고 차디찬 최후를 맞이할 거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다들 한 번쯤은 감상해본 이 작품은 뭉크의 <절규>이다. 이 작품을 설명하기 전에 무엇보다 알고 있어야 할 것은 뭉크의 작품에는 ‘고독과 절규’라는 일관된 키워드가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분석해보자면, <절규>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만화처럼 과장하고 우스꽝스럽게 왜곡시켰다. 몸을 비틀면서 입을 쩍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인물은 보면 안 될 무언가를 본 듯 놀라고 있다.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화면을 단절시키는 다리와 난간, 그림 후방의 가늘고 긴 두 사람, 황색·적색·청색에 의한 다이내믹한 색채 등은 극적 효과를 드높인다. 이 작품은 특히 현대사회에 큰 호소력을 지니는 작품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언제든 사회에서 자신이 내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 또한 더해진다. 그림 속 이름 모를 누군가가 불안함을 애써 감추고 살아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소리쳐주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절규하고 있는 이와 원경 인물의 무관함은 이러한 상황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고, 절규하고 있는 이는 사내, 무관심한 원경에 두 인물은 안과 나로 「서울, 1964년 겨울」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듯하면서 불안한 현대인의 공감을 자아낸다.

 

"나는 두 친구와 길을 걸었다. 태양이 지고 있으며, 나는 멜랑콜리의 기미를 느꼈다. 갑자기 하늘은 피 같은 빨강으로 변했다. 나는 멈추어, 길 난간에 기대었고 죽은 자처럼 피곤했다. 나는 블루 블랙의 피오르드와 도시를 넘어 피처럼 불타는 구름을 보았다.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전율을 느끼며 서 있었다. 나는 자연을 꿰뚫은 큰 목소리의 절규를 느꼈다." 뭉크가 <절규>를 그리던 당시 심정을 작성한 글이다. ‘피 같은 빨강’과 ‘피처럼 불타는 구름’은 「서울, 1964년 겨울」 속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이 생각나게 한다. 사내가 그 불길을 보고 죽은 아내를 판 돈을 불길 속으로 던져 버린 것처럼, 뭉크가 죽은 자처럼 피곤해진 것처럼 고독과 소외는 우리를 망가지게 한다.

 

참고 및 인용자료 출처

1.참고: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4363&cid=46645&categoryId=46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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