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연의 사색 칼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내가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구절을 반복해서 읽을수록 시의 '나'와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주체와 대상이 주종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만남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나는 이번 칼럼에서 기생과 공생, 그리고 그 주체들의 상호 관계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인용 : 김춘수 <꽃> 2연)

 

두 단어의 사전 의미를 찾아보면 공생은 서로 도우며 살거나 종류가 다른 생물이 같은 곳에서 살며 서로에게 이익을 주며 함께 사는 일이다. 기생은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생활하거나 서로 다른 생물이 함께 생활하며 한쪽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이 해를 입고 있는 일 또는 그런 생활 형태를 의미한다.  공생 관계의 예를 찾아보면  악어와 악어새, 충매화와 곤충, 콩과 식물과 뿌리혹박테리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정해진 특정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꽃과 꿀벌, 주인과 애완견, 까치와 나무, 부모와 자식, 국가와 개인처럼 주변에서 공생관계를 친숙하게 볼 수 있다. 기생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기생 관계에는 인간과 기생충, 포유류와 모기, 진딧물과 개미, 인간과 바이러스 등을 일반적인 예로 들 수 있지만, 위에 공생관계에서 나열한 주변의 친숙한 공생관계가 때론 기생 관계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인용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03248&cid=61232&categoryId=6123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46741&cid=62861&categoryId=62861)

 

 

다시 말해 기생과 공생 관계는 영원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것이며 어떤 관계로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맘만 먹으면 그 관계가 변할 수도 있다.  집 주인이 애완견을 기르며 최소한 생명 유지를 위한 물과 밥만을 지속해서 제공하고 그 외의 사랑이나 관심을 주지 않으며 애완견도 주인이 주는 밥을 편안히 받아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르게 잠만 잔다면 이는 기생 관계이다. 반면 주인이 밥뿐 아니라 애정과 관심을 쏟으며 애완견 또한 주는 밥을 먹고 주인에게 애교와 충성을 보여 행복감을 보답으로 준다면 이는 공생관계라 할 수 있다. 공원에 애완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면 강아지와 더불어 사는 건강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정성과 사랑으로 바르고 건강하게 자식을 키우며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끼며 자식도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건강하게 크는 것은 부모가 힘들 때 짐이라도 같이 들어줄 수 있는 공생 관계이다. 반면 부모가 힘들게 직장 생활하며 뒷바라지하고 밥을 먹이고 자식을 키워주나 자식이 자식 된 도리를 느끼지 못하고 핸드폰 게임만 하다 성인이 되도록 독립을 못 하고 늙은 부모에게 계속 의지하는 캥거루족, 자라 족이 된다면  기생 관계라 할 수 있다. 국가와 국민도 마찬가지이며 기업과 개인. 친구와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공생이냐 기생이냐는 그 주체들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상호적이어야 더욱 공생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기생이 아닌 공생을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되고 그러면 누군가도 내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가 잘될 때 공생관계로 나아갈 수 있고 주변의 작은 관계들이 좋은 공생관계로 더 나아가 국가가 세계가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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