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의 독서 칼럼] 고통의 질량

편혜영, 「해물 1킬로그램」 독서 칼럼

 

밤은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밤은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이며, 인간의 영역에서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다. 편혜영 소설가의 『밤이 지나간다』는 주로 밤처럼 반복되는 어떤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책의 뒤표지에 실린 조연정 문학평론가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밤이 지나간다.’ 이 문장은 명백히 현재형의 문장이다. ‘지나간다’라는 말 안에 이미 과거를 품음으로써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묘한 현재형의 문장이다.” 단편집 『밤이 지나간다』 속 작중 인물들은 현재형의 삶을 살고 있다. 여느 밤이 그렇듯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없는 현재의 밤을 지나가고 있다. ‘밤’은 ‘고통’의 단순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단순하게 직관적이라는 데서 무섭게 보편적이다.

 

「해물 1킬로그램」은 섬세한 심리묘사가 특징이다. 유괴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 엠은 남편의 권유로 아이를 잃은 엄마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함께 비슷한 고통을 나누며 자책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는 모임, 하지만 엠은 자신이 느꼈던 고통이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데서 불쾌감을 느낀다. 사람을 잃는다는 문장은 어색하면서도 무섭다. 필자도 초등학교 3학년 때쯤 동생을 잃을뻔한 적이 있다. 동생이 올 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필자는 방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고 바깥에서 문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었는데 동생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한참 후에 문밖에 나가보니 해가 저물고 있는데 동생이 없었다. 동생은 여섯 살, 시골로 어린이집을 다녀서 동네에 놀 친구도 없을 터였다. 급하게 엄마, 아빠께 전화했고 필자는 분명 문소리를 들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고 찰나였다. 주차장으로 아파트 상가로 분주하게 뛰는 부모님 필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상하다, 동생이 좋아하는 빨간 줄 섞인 검은 운동화가 집에 있었다. 집엔 숨을 곳이 마땅치 않다. 장롱이며 문 뒤, 베란다까지 다 살폈는데 동생이 없었다. 정말 한참 후에야 제 몸만 한 장난감 통과 책꽂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 자는 동생을 발견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동, 10살 남짓의 여자아이는 집에 들어가 있으라는 부모님의 단호한 말을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공동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뛰어다니는 부모님을 바라봤다. 그때 필자가 느낀 ‘사람을 잃는다’라는 것의 두려움은 순간, 어떤 문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비교할 수 없겠지만 엠과 모임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말함으로써 고통을 확인하고 때론 해소하려고 했는데, 모임의 이야기를 읽으며 재미있는 부분을 몇 발견했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공감을 얻고 싶어 한다. 내면의 깊은 이야기라 생각될수록 상대의 반응에 대해 기대를 하게 되고, 공감을 얻지 못하면 서운함은 커지기 마련이다. 다수에게 풀어놓는 말일수록 쉽게 공감될 수 있다. 그리곤 줄곧 그 다수의 공감에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공감이 위로에 그치지 않고 동질감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감정에 대한 알 수 없는 자부심과 동시에 상대의 감정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엠이 모임에서 느꼈듯 말이다. 물론 인간의 행동과 감정에 관해 이렇게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 감정에 관해 가졌던 자부심은 알게 모르게 기대, 실망, 위로, 상실 등의 형태로 흩어졌으니까.

 

모임에서 표면상 ‘리더’ 역할을 하는 ‘큐’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어떤 권력도, 권한도 없으며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끼리 모임의 관리자 차원에서 주어진 ‘리더’라는 이름, 큐를 보며 학교든 회사든 여러 모임 내에서 있을 법한 능청스러운 연기자를 보는 듯했다. 고통을 나누는 모임의 리더, 그렇다면 큐는 고통의 리더였던 걸까? 어쩌면 큐도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래서 엠에게 자꾸 연락하며 자신의 상황대처 능력을 인정받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밤이 지나간다』 에서 ‘밤’과 함께 부각되는 소재가 ‘비밀’인데, 「해물 1킬로그램」은 비밀을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닌, ‘비밀인 척’ 공유함으로써 각자의 ‘비밀’이 진정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범죄 심리학자인 박지선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말이 중언부언 많은 사람일수록 비밀이 많다. 중간중간 자신의 말속 빈틈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게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과 ‘비밀’, ‘설명’ 같은 단어는 범죄자의 심리를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소한 대화의 형태도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실은 고통이라는 게, 자꾸 말함으로써 확인하고 자책해야 하는 감정은 아닌 게 아닐까. 모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수사’를 붙여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려 하지만 결국 똑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느꼈던 찢어지는 고통은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게 되고 만다. 모임에 모인 사람들 모두 결국 고통을 ‘말함’으로써 낯선 사람들에게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어떤 중요한 내부로 자꾸 파고들어 가고, 숨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해물 1킬로그램’이라는 소재는 케이에게도, 엠에게도 무언가를 변명할 때 쓰인다. 왜 하필 1킬로그램의 해물일까, 단순히 찜의 요리법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케이에게도 엠에게도 수치화될 수 있는, 정확히 떨어지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 아니었을까. 눈앞에 놓인 고통은 형태도 없고 너무 불분명하니까. 정신없이 전단지에 넣었던 ‘쌍가마’, ‘앞니 빠진’ 같은 표현들, 작은 표현 때문에 모든 일이 이렇게 된 것만 같은 고통, 발견할수록 그 원인이 너무 사소한 것 같아 생기는 죄책감, 안에서는 다시 볼 일이 없다는 듯 밖에서 할 말이 있다는 남편, 모든 게 불분명하다.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표현이 사실은 큰 부분을 차지할지도,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소한 걱정거리였을지도 모르는 ‘현재형’의 상황에서 케이와 엠은 정확히 맞출 순 없지만 재볼 수는 있는 ‘해물 1킬로그램’을 내세운 게 아닐까. 고통은 맞출 수도, 재볼 수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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