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의 독서 칼럼] 누구에게나 친절한, 상대는 AI다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독서 칼럼

 

스포츠나 게임을 할 때 상대가 규칙을 잘 모른다면 어떨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나의 공격에 일관된 반응을 보이고 계속해서 방어를 실패한다면 마치 ‘초보자용’ 혹은 ‘혼자 게임하기’와 같은 옵션을 선택해서 AI와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의 강민호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작은아버지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전단을 본인 앞으로 돌려놓다가 작은 문제가 생겼다. “나로선 어쩐지 그게 좀 촌스럽게만 여겨졌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릴 겸 겸사겸사 고향으로 향한다. 복잡한 가족 관계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민호의 모습은 ‘작은아버지 마음 풀어드리기’라는 퀘스트를 수행하러 원정을 떠나는 게임 캐릭터와 다르지 않다.

 

이것도 다 작은 아버지 때문인가.

나는 일부러 계속 작은아버지 탓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 되지 않았다.

_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中

 

우연히 맞닥뜨린 윤희와 종수의 문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도 퀘스트의 본래 목적을 잊지 않으려 하는 모습, 한마디로 신경이 온통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다. 정황을 보면 윤희와 민호는 옛 연인이었던 것 같은데 윤희, 민호, 종수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것도 민호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함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윤희와 민호의 대화에서도 윤희만 격양되어 있지 민호는 윤희의 모든 반응을 의아해하기만 한다. 그리고는 또 퀘스트를 하러 온 사람처럼, ‘반증 이론’까지 덧붙여 히잡을 쓰지 말 것을 설득하려 한다.

 

 

윤희, 종수, 민호, 세 사람의 상황과 성격은 주로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 대화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래도 윤희가 형을 많이 따랐잖아요? 저한테도 종종 형 얘길 했는데……”, “전, 걔가 도대체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와 같은 난처한 말이 오갈 때 종수와 민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한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행위는 외면하고 싶은 인물의 심리를 보여준다. 뜬금없이 시작된 종수와 민호의 ‘탁구’도 둘의 대화를 직접 비유한 것 같다. “언제 누구에게 배운 거냐는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랠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와 같은 문장을 통해 윤희와의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옛 연인이었던 종수에게 할 말이 많지만, 탁구를 통해 무언의 공격을 하는 것 같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퀘스틀 하러 P읍에 온 민호에게 윤희는 변수였다. “대신 나는 이 모든 상황들이 다시 귀찮게만 느껴졌다. 시간만 어이없게 흐르는 기분이었다.”라는 문장 바로 다음부터 윤희와 민호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계속해서 설명과 설득만 늘어놓는 민호에게 윤희는 어떻게 그렇게 인색할 수 있냐며 정말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히잡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버린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히잡을 썼던 윤희가 말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건 누군가에겐 서운함이거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감정의 저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감정의 크기를 가늠하는 방식,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니까. 혼자 사는 집에서 시리나 빅스비에게 안부를 묻고 위로를 얻고자 하는 모습은 광고에서와는 다르게 실제로 많은 허무감이 들게 한다. 누가 물어봐도 똑같은 답을 해줄 것이고, 나에겐 크기가 다른 슬픔도 똑같이 “괜찮아요. 내일은 더 잘 될 거예요.”라는 말로 위로받게 될 것이다. 친절함이라는 능력치가 과잉된 사람, 그는 교회 오빠 강민호였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돌볼까? 소설 중간중간 힌트가 있다. 강민호가 자기 자신을 안도할 수 있었던 건 종교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종교’는 신성한 믿음을 통한 종교적 위안보다는 본인을 합리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인다. 종수와 함께 우연히 만난 최민우 선생은 민호를 반기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교 선생 한다며? 아버지한테 다 들었네만.”

“내가 자네 우리집에서 공부할 때부터 알아봤어. 아무 걱정 하지 마. 하나님께서 다 인도해주실 테니까.”

_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中

 

교회에는 적어도 강민호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물론 ‘서울에서 대학교 선생’을 한다는 전제로 말이다. 최민우 선생은 대놓고 종수를 무시하는 듯하다. “자넨 오늘 철야예배 안 가나.”하고 말이다. 그리곤 또 “철야예배 지각일세.”라며 민호와 종수를 떠난다. 민호는 산상기도를 하러 갔을 때를 추억하며 ‘삶이 모든 의미들로 가득 차 있던 시간들’이라고 표현한다. 종교가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일까. 이 생각을 계속했다. 종교의 믿음이 요즘 사회적 이슈이기도 하니 말이다. 최민우 선생에게도, 윤희에게도, 민호에게도 믿음이라는 걸 어떤 때 믿음이라 불러야 하는 걸까. 믿음으로 보이는 것을 믿는 것과 오로지 믿음으로써 믿음이라 말하는 것, 어려웠다. 모든 것은 의심을 통해 비로소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 어느 철학자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