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의 독서 칼럼] 수단이 되어버린 식단

한강, 『채식주의자』 독서 칼럼

“이래도 되는 건가?”

책장을 넘기며 계속 들었던 생각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으로도 유명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작가가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너무 선명해서 영혜의 아픔이 활자를 뚫고 나에게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채식주의자”가 첫 번째 목차라서 그냥 단편소설로 끝났으면 조금 찝찝하고 말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그 아픔이 실제로 존재할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오랜만에 오랫동안 불편할 수 있는 소설을 읽은 건, 시를 전공하는 필자에게 ‘문학’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계기가 되었다. 비교적 짧은 언어를 다루며 시를 쓰다 보니 언어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슬픔’, ‘아픔’, ‘눈물’ 같은 단어를 어느 상황에나 쉽게 던져버린 게 아닐까, 정작 쓰는 사람도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말이다.

 

 

영혜는 어느 날 한 꿈을 꾸고 나서부터 채식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정신에 이상 있는 사람 취급을 받고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한 아빠, 흑염소 한약을 속이고 먹이려 한 엄마 등 가족에게까지 육식을 강요받고 자살시도까지 한다. 형님으로부터는 반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한다. 영혜의 정신을 괴롭히는 이러한 상황들을 읽으며, 필자는 영혜가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건강한 딸의 수단, 남편의 위상을 높여줄 아내의 수단, 누군가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단 등으로 말이다. 한 사람의 식단 변화는 작은 변화 혹은 결핍이 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수단화되었다. 진두지휘에 필요한 수단이 되었다. 사실 인간의 수단화는 영혜의 경우처럼 극단적이고 피폐하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기계적으로 택배를 나르고, 물건을 포장하고, 어떤 교감도 없이 음식만 주구장창 만들어 내보내는 등 일상의 많은 ‘직업’이라는 것들이 사실상 다른 누군가의 일상이 필요로 하는 수단처럼 사용되고 있다. 수단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보니 소설 속 인물도 결국 수단으로 이용되고 버려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채식주의자』라는 소설 속 인물인 ‘영혜’라는 두 글자는 내용 전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 한강, 『채식주의자』 中

 

 

채식을 시작하고 주변의 강요로 인해 더욱 무언가를 먹는 것을 멀리하게 된 영혜는 점점 야위고 있었다. 그런 영혜의 모습과 심리 상태를 한 문장으로 잘 섞어 표현하여 영혜의 상태가 와 닿았다. 고기 집에서 무려 무한리필 되어 나오는 핏덩이들을 보며, 아주 가까운 거리에 나란히 놓인 불판과 고기 판을 보며 상실감이 들었던 적이 있다. 시장에서 붉은 등 밑에 진열된 돼지 머리 가죽이나 개고기 같은 걸 봤을 때도 그랬다. 영혜가 그랬듯 우리 삶에는 아무렇지 않게 수단이 된 동물들이 있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핑계와 이유로 육식을 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의문을 반복해서 품다보면 죄책감과 욕망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범죄자가 흔히 빠지는 딜레마인데, 그렇다면 인간의 식단이 범죄가 될 수도 있는 걸까? 어린 시절, 영혜가 자라온 환경 속 폭력적인 가정환경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채식주의자』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인간의 폭력성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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