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의 독서 칼럼] 일상의 작은 균열도 어쩌면 폭력

권정현 <칼과 혀>에서 발견한 생의 폭력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 먹을 때 가장 행복해요.”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누군가 이렇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받았던 ‘내가 행복한 순간’에 대한 질문, 필자는 그걸 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그리고 위와 같은 답변은 행복의 형상을 내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김치찌개 하나만을 놓고 한 숟갈씩 떠먹을 수 있다는 것, 젓가락에 너무 많이 딸려온 미역 줄기를 덜어내 줄 또 다른 젓가락이 한 상에 함께 있다는 것, 사소한 발견들은 반찬이 그리 많지 않은 밥상에서의 허기를 달래주곤 한다.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권정현의 장편소설 『칼과 혀』는 인간의 본성과 폭력성을 다루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동북아시아를 배경으로 조선, 중국, 일본 각 나라의 세 인물이 만나 그려내는 풍경은 전쟁 이면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에겐 ‘허기’가 존재한다. 그들의 공허함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식욕’으로서 나타난다. 소설에서는 무언가를 먹고자 하는 것도 언제든 폭력적인 형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과 혀』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에서도 포만감을 건드린다. 식욕이든, 소유욕이든 각자의 성에 차야 만족하는 일종의 포만감. 날카로운 칼로 포만감을 찔러 무의식에 자리한 빈 곳, 허기를 확인시켜주기도 하고 부드러운 혀로 살살 달래며 당신의 그릇에 자리한 포만감을 금세 녹여버리기도 한다. 식욕도 무언가를 먹는 행위도 언제든 폭력적인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칼' 과 '혀’, 누군가는 두 단어의 배치가 너무 잔인하다고 말했다. ‘칼’과 ‘혀’는 그야말로 식욕과 폭력성 둘 사이에 내재해 있는 복잡한 관계를 단순하게 지칭해주는 가장 완벽한 단어이다. 300여 페이지의 장편소설을 읽으며 칼과 혀 사이에서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필자를 건져내느라 한창 몰입해 읽었다.

 

1부에서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게 제시된 세 인물의 인연은 책의 중반부에서 비로소 겹쳐진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 중국인 요리사 첸, 애국심에 불타는 오빠를 둔 조선 여인 길순까지, 동북아시아 전반을 거친 세 인물의 운명이 겹쳐지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세상은 좁다. 세상이 좁아서, 그렇게 장악하고 싶은 걸까. 전쟁이 그들을 만나게 했다. 책 속 인물 모두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들 역시 폭력적이다. 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연기자’였다. 첸이 몇 번의 고비를 넘어갈 때 아버지가 했던 화려한 말들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보이는데, 사실 그런 말들에 대비하여 아버지가 실제 근엄하고 완벽한 요리사였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생은 비참하게 마감되었고 묘사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된 표현이 많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것을 버리고 왔어야 했다. 피로 얼룩진 눈앞의 저 낡은 도마를, 수많은 영혼들이 칼날에 베여 안간힘을 쓰며 제 죽음을 밀어내던 저 분노의 순간들을. 대륙으로 폭풍처럼 짓쳐들어오는 제국주의자들의 총검과 피바람, 죽어가는 자들의 한숨이 압착된 저 도마를 말이다. 나는 도마 위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다 누군가의 혀를 만족시킬 재료들이나 다름없다.

― 『칼과 혀』 1부 1 中

 

종류별로 주방 벽에 나란히 매달린 날카로운 저 칼들은 보기에 따라 주방의 이빨을 보 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들이 내리치는 것은 결국 빈 허공일 뿐이다. 재료들은 공간 속에 놓였다가 공간 속으로 소멸한다.

― 『칼과 혀』 1부 7 中

 

『칼과 혀』에서 ‘도마’의 역할은 그렇다. 인간의 폭력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고 있다. 묵묵히 칼날을 받아내며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대를 잇고 있다. 단순히 요리사라는 직업을 대물림 하는 매개로만 작용하는 게 아닌, 인간의 폭력성은 개인에서 그치지 않고 누구에게나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도마는 우리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존재이다. 즉, 식욕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위에서 어떤 생명은 생의 마지막 힘줄까지 끊어내야 한다.

 

 

“나는 또 다른 안과 윤이 될 거야.” ― 『칼과 혀』 1부 3 中

 

폭력은 무형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길순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빠의 아이를 품은 숙영은 오빠가 떠나는 기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아니 제 갈 길을 가듯 무심히 걸어갔다. 그런데도 오빠는 그 기차에 평온히 앉아 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꿈꾸고 있었다. “숙영이 자살한 게 아니라 오빠의 무관심이 죽인 거야.” 길순은 숙영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빠의 혁명에 대한 야망, 여동생 길순을 향한 그릇된 욕망, 숙영에 대한 무관심, 이 모든 무형의 것들은 길순에게 폭력으로 다가왔다. ‘뒷마당에 앉아 책을 읽어주는 오빠의 변성기가 갓 지난 목소리’ 까지도 오후의 나른하고 조용한 풍경 안에서 어색하게 겉돌고 있다. 길순은 오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썩어 악취를 풍기는 혁명 주의자. 내가 죽여야 하는 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이 아니라 오빠라는 사내들인지도 몰라.” 길순은 오빠의 폭력성을 시작으로 남자, 더 나아가 사랑까지,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된다.

 

조선 여인 길순이 화자가 될 때마다 어투는 바뀐다. 독자들에게 편하게 털어놓는 것도 같고, 자신만 보는 일기에 쓰듯 말하는 것도 같다. 길순의 오빠 역시 조선인이고 조국을 위한 혁명을 꿈꾸는 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독자가 길순의 오빠보다도 길순에게 더 정을 갖게 되는 것은 아마, 혼란스러운 전쟁에서 진심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길순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국민, 누군가의 딸이자 여동생이자 아내이자 여자로서의 한 사람, 아무런 죄도 없이 권력자들의 지휘 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희생당해야 했을 우리 민족을 대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 하나가 떠오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생의 순간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걸, 엄마의 배 위에 레이스처럼 박힌 살 튼 자국의 흰 상처를 보면 알 수 있다. 상처가 부드러운 레이스처럼 보이기까지 엄마가 감내한 폭력의 세월은 어땠을까. 열아홉의 필자는 『칼과 혀』를 읽으면서도 생에 대한 철학적 생각의 굴레로 자꾸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첸과 모리의 결핍된 모성애를 찬찬히 따라 읽으며 길순이 어디에서나 잘 살아가기를, 바라고 바랐다. 이 세상의 모든 ‘길순’이 폭력을 감내하면 전쟁은 이제 아마 없을 테니까.

 

우리는 크고 작은 폭력에 둘러싸여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에겐 욕망 실현을 위한 폭력성이 내재한다. 본인은 느끼지 못해도 욕망 실현을 위한 자신의 행위는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어려운 것은, 나에게 내재한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폭력성을 인정하고 조율하여 욕망과 폭력의 간극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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