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우의 영화 칼럼]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내용 미주알 고주알 다 말하니 주의하십시오)

 

<이터널 선샤인>. 영화의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로, 엄청나게 길다. 티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 꽤나 어렵기도 하다. 

 

영화의 주 줄거리는 자신의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는 것을 안 조엘이 자신도 기억을 지운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조엘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따라 조엘과 클레멘타민의 사랑의 행로를 걸어내려간다. 

 

처음에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것을 통쾌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의 나쁜 기억은 하나 둘씩 먼저 사라지고, 서로를 사랑했던 예쁜 기억만이 남는다. 조엘의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은 다시 처음 그대로의 사랑스런 여인이다. 기억은 모호한 촉감과 향기로만 남고, 그 모호함은 지나온 시간의 잔여물을 필연적으로, 더 아름답게 포장해 품는다. 조엘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키려 하지만 이미 지우기로 결정한 이상 뒤늦은 후회는 소용이 없다. 

 

이 영화에는 하나의 서브플롯이 더 등장한다. 조엘의 기억을 지우는 라쿠나 회사 직원들의 이야기. (영화를 보다보면 찰리 카우프만의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을 엮는 능숙한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두 이야기의 인물들이, 그들의 드라마가 전혀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엮인다) 라쿠나 회사의 메리(커스틴 던스트)는 회사의 사장(기억을 지우는 기술을 개발한 박사)하워드 박사를 사랑한다. 영화 내내 메리는하워드 박사를 향한 동경을 드러낸다. 조엘의 기억을 지우는 중 결국 메리는 하워드 박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있다. 둘에게는 이 과정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과거에 메리는 자신의 행동을 들키자 죄책감과 괴로움에 기억을 지웠고, 또 사랑에 빠지기를 반복한 것이다. 감정에 이성은 별 쓸모가 없다. 특히 사랑에는 그렇다. 흔히 ‘머리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이성이 아닌, 오로지 감정과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영화의 말미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몬탁의 바닷가에서 재회해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래, 머리로는 어떻게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인물들은 그들이 끝내고자 했던 감정을 다시 느끼고, 모든 과정을 반복하기를 희망한다.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서로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과 그 과정을 낱낱이 알게 된다.

 

“나는 당신의 모든 게 마음에 드는걸요.”

“그렇겠죠, 하지만 이제 곧 당신은 나를 싫어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또 서로 상처입히고 미워하겠죠.”

“상관없어요(It’s okay).”

“…상관없어요((It’s okay).”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다. 이게 영화의 끝이다. 

 

끝을 알면서도 사랑에 뛰어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지 않은 우리들의 사랑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고, 끝은 어떤 모양이든 간에 마음에 자국을 남긴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타인에게 마음을 준다. 모든 감정은 시간과 함께 퇴색하고, 모든 관계는 끝을 위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없이 사랑을 한다. 관계를 맺고 정을 주고, 후회하고 미워한다. 그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견뎌내면서 말이다. 어쩌면 어떤 것을 사랑하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모든 존재는, 생에서 느끼는 모든 것들은 어리석은 불나방의 춤이 아니라 넓디 넓은 공간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그럼에도' 시간에 저항하는 나름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그 모든 시작은 진정 티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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