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현의 정치/시사 칼럼 4] 펜이 칼보다 강한 이유

현대 사회의 부조리, 그 정점에 서 있는 언론 권력을 파헤치다-마지막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언론)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뉴스(언론)는 공적인 삶의 풍조를 조성하고 우리 각자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힘이다. 뉴스(언론)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만드는 으뜸가는 창조가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언론)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는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서문 중 일부이다. 이처럼 언론은 사회가 근대화함에 따라 강력한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힘은 언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말하기의 의미’에 따르면 언어활동은 상징적인 층위에서 행사되는 일종의 폭력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달리 언어는 대화 상황에서 상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폭력성을 지닌다. 우리는 흔히 ‘말 속의 뼈’를 주장하곤 한다. 즉, 언어는 경우에 따라 특정인을 공격할 수도,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는 물리적 폭력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쉽게 폭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폭력에 대항하는 상반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이 지배질서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즉, 그 본질이 지배질서를 공고히 했다.

 

다시 언론에 대해 논해보자. 발전과 진보를 겪으면서 사회는 ‘힘 보다는 말’, ‘폭력이 아닌 대화’를 추구해왔고, 이를 교양 혹은 합리성으로 포장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그 중에서도 언론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자신들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언론은 권력자들과 손잡고 그들을 추앙했고, 정치인들은 그 언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치인들의 더러운 면모를 손수 가리고, 그들을 비호하면서 어느새 스스로 또 다른 권력을 형성했다. 언론은 ‘정보’라는 가치를 독점했고, 사람들은 그 ‘정보’라는 가치를 조금이나마 얻기 위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뉴스를 확인하는 것을 습관 삼았다. 사람들은 뉴스가 신의 계시인 양 뉴스를 통해, 언론을 통해 선악을 구별하기를 바라고 고통을 헤아리기를 원하며 세상의 이치를 알기 원한다. 그렇게 지구상에서 뉴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져간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믿기에 힘을 얻게 되었는가. 언론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큰 도구는 ‘프레이밍 Framing', 말 그대로 짜여 진 틀에 가두는 것이다. 주요 일간지의 기사 제목을 살펴보자. 지난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예로 들자면, 진보 성향이 강한 A 언론사의 제목은 「문대통령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만들겠다.”」였고, 보수 성향이 강한 B 언론사의 사설 제목은「아무도 흔들어 대는 나라의 국민은 기가 막힌다.」였다. 또 다른 사례로는 최근 큰 이슈였던 선거제 개혁에 관해 A 언론사는 「민주당, 정개특위 위원장 맡아 선거제 개혁 완수하라」라는 사설을 냈고, B 언론사는 「文대통령 野 협조 요청 앞서 선거제 강제 변경 폭거 접어야」라는 사설을 냈다. 하나의 이슈 혹은 사건에 대한 두 언론사의 제목은 전혀 상반됨이 드러난다.

 

두 언론사 간의 차이는 ‘프레이밍’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앞서 서술했듯 흔히 A 언론사는 진보 색채가 강하고, B 언론사는 보수 색채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람마다 신념이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 다르듯이 사람들이 모인 언론사조차도 추구하는 논조 혹은 지향하는 성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성향을 타인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을 결집하기 위해서 그 성향에 걸 맞는 제목을 걸고 기사를 작성한다. 흔히 ‘데스크’라고 하는 보도국의 컨트롤타워에서 이를 제시하고 이끄는 것이다. 문제인식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언론이 ‘어떤 문제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칫 이러한 행위가 권력과 유착할 경우 사람들을 틀 속에 가두어 세뇌하고 자신들 스스로의 권력을 생성, 강화하는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프레이밍을 통해서, 앞서 설명한 언어의 본질을 이용해서 누군가를 두둔하고, 누군가를 헐뜯으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위도 불사하는 병든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모 언론사의 외국어판 제목 논란이다. 국문 제목과는 다르게 조국을 폄훼하고 깎아내리는 제목으로 고쳐 낸 것이다. 이처럼 언론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만들어내는 으뜸가는 창조자이자 우리 사회 위에 군림하는 킹메이커, 상왕이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대표 격인 언론의 여러 면모에 대해 논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언어의 본질에 대해 다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언론의 악 기능을 인정하고 이를 억제하면서, 동시에 순기능을 활성화하여 사회의 진보를 꿈꿔야 한다. 사실 여태까지 언론의 어두운 면을 조명했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듯이 언론에도 공적인 삶의 풍조를 조성하고, 악을 바로잡으며 선을 권하는 등의 순기능이 존재한다. 언론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함과 동시에 순기능을 더욱 확대하여 사회의 견고한 진보와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관용표현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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