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지우 경제/역사 칼럼] 세계 대공황과 뉴딜 정책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 한 가지는 공포 그 자체이다.   

- 1933년 취임연설에서 프랭클린 댈라노 루스벨트

 

 

1929년 광란의 20년대를 상징하는 화려한 거품이 꺼지며, 대공황이 발생하자 미국은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당시 미국 대총령은 후버였다. 사람들은 후버가 자유주의 신봉자로서 경제 위기가 시작되는 것을 방치하다, 결국엔 제때에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 후버 대통령도 나름대로 부흥금융공사를 설립하여 경제 회생에 주력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연방정부의 공공지출을 늘리는 것이었다. 거대한 후버 댐이 바로 당시 경제 회생을 위한 공공지출의 일환으로 건설된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그는 기초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정부가 생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보다는 모든 재정을 금융기관에 쏟아부어 파산을 막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후버는 경기가 금방 회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금융기관이 회복되는 대신 사람들은 부에 대한 기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1933년 미국경제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의 첫 번째 경기 부양책은 지폐의 대량 발행이었다. 미국은 1929년부터 긴축통화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채무자의 부담이 나날이 증가되고, 채권자 역시 빌려준 돈을 회수받지 못해 파산에 이르는 이가 많았다. 긴축통화는 채권자, 채무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직 물가상승이 회복되어야만 채권과 채무가 균형을 이루어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연방정부는 금 준비법을 통과시켜 달러의 가치를 70% 평가 절하했다. 여기에 연방정부에 은화 주조 권환을 부여하고, 은화와 달러간의 태환비도 연방정부에서 지정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하여 물가상승을 발생시켰다.

 

두 번째 경기 부양책은 신용 대출 확대였다. 처음에는 은행업계로부터 화폐발행권을 매입하여, 은행의 신용도를 회복시키는데 주력하였고, 34년 6월 이후에는 연방정부 산하 부흥금융공사가 상공업계에 직접 대출을 제공하며, 생산성 회복에 힘을 보탰다. 또한 미 의회는 다양한 농민구제법등을 제정해 농민에게 저금리의 대출금을 보장해주고, 파산한 농장은 신용대출 자금으로 자기 자산을 재매입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세 번째 경기부양책은 재정적자의 증대였다. 재정 적자를 통해 공공사업을 진행시키며, 시민들의 구매력을 재고했다.

 

정부의 강력한 정책 덕분에 경제는 다시 살아났다. 기적과도 같은 발전을 보이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주식 시장 규모가 1929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전체 GDP도 두배 가까이 상승했다. 1934년 뉴딜 정책 실시 2년째 되던 해 미국 GDP는 전년 대비 17% 증대 되었다. 뉴딜 정책은 미국 본토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경기 부양책이였다. 달러의 가치는 계속해서 평가 절하되어, 값싼 미국 제품이 전 세계로 팔려나가며 미국 경제는 다시 상향세를 그리며 대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전에 본인이 쓴 칼럼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경제는 지금 꾸준히 하향세를 기록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부 지자체에선 책을 6권 빌리면 2만원을 주는 제도를 펼치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뉴딜 정책을 본따서 지역 공공사업에 투입하게 하는식으로 실업 인구와 예산을 더 생산성 있게 활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