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규의 시사 칼럼] 미생지신(尾生之信)

‘중국 노나라의 미생이라는 사람은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여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선 거센 비가 내려 강물은 점점 불어났고, 여인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지켰던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고만다. 그는 충분히 강물을 피할 수 있었고,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도 있었다. 미생은 원칙과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더 소중한 것을 잃었다.

 

미생과 약속을 했던 여인은 일찍이 외출을 포기하였고, 미생은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인을 기다렸다.

여인과의 약속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소중했던 것은 아니였을 터. 그 순간 미생이 지키고자 했던 신의는 아무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허울뿐인 것이 되었다. 미생이 강물을 피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대상도, 목적도, 동기도 없이 그저 신의를 위한 신의를 지켰을 뿐이었던 것이다.

 

불의와 부정의함에 눈감고 기회주의에 기대 원칙과 대의명분은 저버린 이들이 성공하는 시대에 지나친 고지식함으로 융통성 없는 태도를 보여주는 미생지신의 고사는 자칫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면 변화하는 상황에는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과 융통성의 문제라기 보다, 차라리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문제에 더 가깝다. 여인을 기다리다가 물에 빠져 죽고말았던 미생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각없이 유대인들의 죽음을 방관했던 ‘평범한’ 아이히만의 공통점은 바로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갈림길에서 어리석음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미생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칙과 명분, 대의와 신의, 미생을 나타내는 이 단어들은 결국 어리석은ㅡ나아가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충분히 이용될 수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최종 책임자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이를 실행에 옮겼던 법관들의 재판이 본격화됐다.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 및 법관 인사 불이익 조치 등 지난 정부 시절에 이루어진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것이다. 옳지 않은 행동을 그저 원칙과 대의명분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고집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다.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사건에서 실무자 역할을 한 판사들은 “상급자들의 지시를 받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물론 그들이 만약 상급자들의 지시를 거부했더라면 조직 내에서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댓가를 감수하고서라도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릇된 원칙과 관습, 관행에 반기를 드는 이들로 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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