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빈의 영화 칼럼]엄마, 나는 당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어요. <레이디버드>

영화로 보는 세상 이야기

 

 

오늘은 특별히 가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청소년들을 위한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둥지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새끼 새의 이야기. 가족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청소년은 드물다. 떠오르는 차세대 영웅 캡틴 마블이었다면 ‘불주먹‘으로 가족 문제를 멋지게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레이디버드는 슈퍼파워가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한 19살 여성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레이디버드는 물론 주인공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소도시를 벗어나 세련된 삶을 살고 싶어하는 크리스틴 맥퍼스(시얼샤 로넌)는 스스로에게 레이디버드라는 예명을 지어 주기에 이른다.

 

레이디버드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예명이 그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 순간부터 크리스틴이라는 흔해 빠진 이름은 그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삶보다는 스스로 확립한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크리스틴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크리스틴은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하는 조건의 질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틴은 비싼 학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보내 달라고 요구한다. 집에서 시한폭탄으로 통하는 크리스틴은 늘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는 사람 같은, 신랄하고 비이성적인 태도를 취한다. 엄마와 함께 쇼핑을 간 크리스틴은 링 위에서 더없이 아슬아슬한 게임을 벌이다가도 엄마가 골라 준 예쁜 원피스를 보며 아이처럼 기뻐한다. 크리스틴이 엄마와 불편한 대화를 계속해 나가다가 자기 취향에 꼭 들어맞는 예쁜 옷을 발견하고 환호하는 장면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름만을 부정하지 않는다. 러닝타임 내내 그녀는 엄마 매리언을, 가족의 존재를 부정하려 든다. 뉴요커가 되고자 하는 크리스틴의 원초적인 욕망은 엄마를 부정하려는 다양한 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크리스틴의 엄마 매리언은 42세에 딸을 얻은 늦깎이 엄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지 않자 매리언은 자신이 불임이라고 판단, 시설에서 남자아이를 입양해 기른다. 하지만 매리언은 불임이 아니었고, 마흔둘의 나이에 뱃속에서 딸이 움직이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늦게 얻은 딸 크리스티는 매리언과의 충돌을 즐기는 듯하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크리스틴은 집안 형편을 고려해서 서부 지역의, 학비가 저렴한 대학을 권하는 매리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남편이 실직한 탓에 간호사 월급만으로 네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지만 매리언은 내색하지 않는다. 새크라멘토를 떠나고 싶어하는 딸과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네 가족의 생활을 꾸려 나가는 매리언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딸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오직 엄마만이 줄 수 있는. 그러나 크리스틴은 자신이 매리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엄마에 대한 딸의 감정은 훌쩍 커버린 딸을 보며 엄마가 느끼는 감정과 결이 다르다. 크리스틴이 딸로서 매리언에게 갖는 감정은 ‘애증‘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반면 매리언의 사랑은 부메랑처럼 자꾸만 그녀에게로 되돌아온다. 사랑의 크기가 혼자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더라도, 엄마는 절대 딸을 포기하지 않는다. 매리언이 겪는 고통은 크리스틴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매리언은 크리스틴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딸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엄청난 크기의 고통을 겪으며 그것이 축복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엄마를 부정하려는 시도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크리스틴은 보통의 여자아이들처럼 남자 친구에게 의지한다. 크리스틴의 첫 번째 남자친구 대니는 어처구니없게도 크리스틴과 사귀는 도중에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크리스틴은 죄책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대니를 따뜻하게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갑자기 닥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척 혼란스러워한다. 엄마의 조언이 절실한 순간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매리언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가는 지금, 이성 친구 문제로 엄마에게 조언을 구하기가 창피하기도 했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오만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난 다 컸어. 엄마 도움 따윈 필요치 않아. 두 번째 남자친구인 카일과 하룻밤을 보낸 크리스틴은 자신이 기대하는 특별한 뭔가가 남자 친구들에게 없음을 깨닫고 실망한다. 불과 얼음의 발레를 기대했던 크리스틴에게 주어진 건 한 줌의 모래였다. 졸업을 앞둔 크리스틴은 특별한 무언가를 향한 맹목적인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상점에서 성인용 잡지와 담배 한 갑을 구입한다. 하지만 미적지근한 느낌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배앓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틴이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동부 대학교에서 합격 통지서가 날아든다. 매리언은 남편 래리에게 뉴욕으로 떠나는 크리스틴을 배웅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차를 돌려 공항으로 향한다. 크리스틴이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매리언은 남편의 품에서 눈물을 터뜨린다. 내 딸, 너무도 자랑스러운 나의 딸, 떠나기 전에 한번 꼭 안아줄걸. 사랑한다고 말해 줄걸.

 

 

딸들은 엄마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안 되는 거야? 내 편 들어주면 안 돼? 엄마잖아.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뭘 얼마나 더 해야 하는데? 널 사랑해,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 거고. 나는 네 엄마니까. <레이디 버드> 중반부에 졸업 파티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크리스틴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매리언에게 그냥 예쁘다고 해 주면 안 되는 거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탈의실에서 나온 크리스틴은 환한 얼굴로,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만 엄마 매리언은 너무 분홍빛 일색이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인다. 마침내 크리스틴이 짜증 섞인 투로 말한다. 그냥 예쁘다고 해 주면 안 돼요? 그냥, 그냥 사랑해 줬으면 좋겠고, 왜 그냥 예쁘다고 해 줄 수 없는 건지 궁금한 관계. 그냥, 이라는 말에서 시작된 관계.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줄 수 없는 관계. 엄마와 딸은 그런 관계가 아닐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뉴욕으로 떠난 크리스틴이 매리언에게 전화를 거는 엔딩 장면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듯하다. 크리스틴의 아빠 래리(트레이시 레츠)는 매리언이 크리스틴에게 쓰고 보내지는 않은 여러 장의 편지를 모아 크리스틴에게 보낸다. 타지로 떠난 딸이 부모의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아내가 쓴 대여섯 장의 편지들을 정리해서 딸이 머물고 있는 뉴욕으로 보낸 것이다. 크리스틴의 두 번째 남자친구 카일(티모시 샬라메)은 화려하게 포장한 돌멩이 같은 인물이다.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카일은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데다,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졌다. 한마디로 완벽한 남자다. 카일이 입에 담배를 문 채 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읽는 모습은 크리스틴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카일과 사귀기 시작한 뒤로 크리스틴은 그의 매력이 전만 못하다고 느낀다. 화려한 포장에 크리스틴을 비롯한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꼈지만 포장 속의 내용물이 강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반드르르한 돌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 예전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카일을 앞세워서 십 대 시절의 연애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리고 미성숙한 사랑, 미숙한 판단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십 대 시절의 사랑은 금이 간 모래시계 속에서 새어 나오는 모래알과도 같다. 기대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을 뿐더러, 너무도 순식간에 흘러간다. 크리스틴의 십 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틴의 십 대 시절, 부정으로 얼룩진 시절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갔다. 엄마를 부정하려는 것 외에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던 크리스틴이 뉴욕으로 떠난 뒤,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다. 크리스틴은 부정을 멈추고, 엄마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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