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레 시사 칼럼1] 다시 돌아온 4.19 혁명

  4·19 혁명을 아십니까? 대학생은 물론 중, 고등학생 더 나아가 초등학생까지도 참여한 혁명 말입니다. 1960년에 일어난 이 혁명으로 독재를 일삼던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50년대 자유당 이승만 정부는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언론을 탄압하고 경쟁자가 될 만한 조봉암 같은 정치인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사바사바'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정부패도 심각했습니다. 1960년 선거에서도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 당선은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싸늘한 민심으로 야당 후보가 건재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미 나이가 80대 중반을 넘겼기에 중간에 사망하면 야당 소속 부통령에게 권력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이승만의 후계자인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3인조 5인조 투표 등 너무나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실시하여 선거 당일부터 마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중고등 학생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위는 4월 11일에 3월의 부정선거 항의 시위 과정에서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며 다시금 커집니다.  4월 19일에는 서울에서 시민과 학생의 시위에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무려 사망자 185명 부상자 1천5백여명이라는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총을 쏘아 죽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나서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시위를 벌이게 되자 그제야 이승만은 하야를 선포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시민들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승만의 독재를 보며 한 영국인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기도 했는데, 시민과 학생의 힘으로 그것을 이룩해낸 것입니다. 이 혁명은 1년 후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 정변으로 중도에 흐지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재자를 물리쳐본 승리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에의 희망을 놓지 않게 했고, 오늘날에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4·19 혁명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런 큰 업적을 학생이 주도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사회의 잘못된 모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어른들보다 먼저 나서서 시위하였고, 이는 용기 없는 어른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학생의 마음가짐을 우리는 본받고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장차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혀나갈 인재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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