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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옹호했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아이히만의 악은 평범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한 악'이라고 평가한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이다.

 

여기서 아이히만에 대해 설명하자면, 풀 네임(Full-name)은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히틀러의 나치 정권 아래서 유대인 학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수용소로 유대인을 계속해서 운송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훗날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밤에 체포되어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전면 부인하며,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이 같은 진술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지만,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뉴요커(New Yorker)>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했기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정치 철학자로 '글쓰기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법을 잘 준수하는 시민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이행하면서 그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의 정신 상태에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평범할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죄는 우리가 보기엔 심각한 악이라고 여겨진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충실히 한다고 해서 착한 것은 절대 아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을 안긴다. 그는 아렌트가 보기에 악인이 아니라 ‘명령수행자’였다.

 

여기서 아이히만의 평가는 확실히 드러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한 악'이라고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히만을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결론과는 상반되게도, 아이히만 개인에 대한 아렌트의 평가는 상당히 가혹하다.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글이라고 생각할만한 결론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독자를 놀라게 한다.

 

대표적으로 3장의 제목을 보자면, 제목부터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3장의 제목은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다. 단어 자체로만 보았을 때에는 긍정적인 평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동안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비꼬는 듯한 어투로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반어적이고 확실한 서술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해왔다. 그러한 점에서 이 제목은 아이히만을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3장의 내용은 예상을 적중한다. 아이히만은 스스로를 ‘유대인 문제 전문가’라고 평가했고, 아렌트는 이와는 상반되는 아이히만의 무능력함을 드러낸다.

 

아이히만이 지은 죄가 '악의 평범성'에 해당된다면, 아렌트가 생각하는 아이히만의 죄는 무엇이기에 그토록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판단의 무능'의 죄를 지었다고 평가한다. 죄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말하기, 생각, 판단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생각한 '명령수행자'가 아니라 반유대주의자이고, 치밀한 연기에 아렌트가 속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아렌트가 정의한 '악의 평범성'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악의 평범성'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갖가지 오류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조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 의미가 애매한 문장들, 대상을 확실히 짚어주지 않았거나 독자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번역본의 어쩔 수 없는 오류지만, 완벽한 번역가는 외국어와 한국어를 한 번에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번역가에게 그런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대부분의 번역가는 외국어 능력에만 치중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아렌트의 글은 읽는 동안 계속해서 어렵게 다가온다. 아렌트가 한국인이었다면 작가의 세심한 단어 선택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작가는 이미 한국인이 아니고, 작가가 한글로 글을 쓰도록 할 수도 없다. 결국 독자는 번역본에 만족하거나, 원어를 탁월하게 공부하는 게 이 작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아렌트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내린 평가는,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정말 싫어했고, 가혹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독자가 간접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장치들이 많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독자라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아직도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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