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현의 정치 칼럼 13] 혐오표현과 대항표현

우리 사회의 혐오, 그 끝은 어디인가

우리 사회의 '혐오'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시작되었던 혐오가,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동조하여, 무엇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혐오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심각한 혐오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사회의 혐오 현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혐오에 대항하기 시작할 때, 혐오 사회의 끝이 서서히 보일 것이다.



혐오표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혐오표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개념 1. "자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

-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자유권 규약) 20조 2항


개념 2. "반유대주의, 제노포비아, 인종적 증오를 확산시키거나 선동하거나 고취하거나 정당화하는 모든 형태의 표현 또는 소수자, 이주자, 이주 기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격적인 민족주의, 자민족중심주의, 차별, 적대 등에 의해 표현되는 불관용에 근거한 다른 형태의 증오"

                                                               - 유럽평의회 각료회의의 혐오표현에 관한 권고


우리 사회의 혐오 - '맘충' 과 '노키즈존'


'맘충' 은 아이 엄마의 이미지가 예의 없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기피 대상으로 고착화되어 나타난 혐오 표현이다. 어떤 집단의 부정적인 모습을 관념화하는 것이 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전형적 행태이기 때문에,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집단을 비하하는 표현이 모두 혐오 표현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가 과연 아이와 아이 엄마를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있는지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맘충' 이라는 말의 사회적 해악은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실제로 우리가 '맘충' 이라는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 말이 아이와 엄마에 대한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혐오하는 말이 사용되며 엄마들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두려워한다. 특정 집단의 부정적 측면을 관념화하여 위축시키고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혐오 표현의 진정한 해악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당연 '노키즈존' 이다. 2017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노키즈존을 차별로 결정했다. 영업의 본질적인 목적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차별이라고 볼 수 없으나, 노키즈존은 그러한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엄마가 차별 받지 않고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맘충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을 정도의 말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와 엄마를 환대하는 수많은 시설과 사람들이 있는데, 일부가 그들을 혐오한다 한들 무슨 문제인가. 맘충이라고 말할 자유와, 노키즈존 영업을 할 자유를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는 사회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사회의 혐오 - 퀴어 축제와 반동성애 운동


성 소수자는 낙인으로 인해 배제받고, 심한 차별을 받는 집단이다. 그들에게 있어 '커밍아웃' 자체는 중요한 사회적 행위이다. 퀴어 문화 축제는 축제의 형식을 빌려 성 소수자들이 집단적으로 커밍아웃을 집행한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를 향해 자신들이 여기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 바로 퀴어 문화 축제, 일명 '자긍심 축제' 다. 성 소수자 차별과 배제에 맞선 적극적 저항이기도 하며, 동시에 성 소수자를 사회에 가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 세력과 같은 성 소수자 반대 집단은 "동성애 반대" "동성애는 죄악이다" 라고 말하며, 축제를 무산시키기 위해 로비를 하는 등, 퀴어축제와 달리 성 소수자를 사회에서 비가시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성 소수자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모든 소수자 문제에 있어 정치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미국 공화당 마이클 블룸버그, 영국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 등은 핑크색 옷을 입고 퀴어 문화 축제에 얼굴을 비추고 연설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이정미 의원이 처음으로 퀴어 문화 축제에 참여했고 2017년 정의당 대표로 연설까지 했다. 


반동성애 세력의 비가시화 요구가 관철되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내 눈에 띄지 마" 라는 혐오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나, 우리나라는 일단 행사 자체는 허용되었다. 최악은 면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혐오표현과 대항표현


대항표현은 제3자가 혐오자와 연대하는 것이 아닌, 소수자와 연대하여 혐오에 대항하는 것을 말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성 소수자 차별에 맞서는 연설을 했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오늘 저는 당신들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모든 국가와 사람에게 당신들 편에 함께 서라고 요청합니다." 


성 소수자라고 하지 않고, 그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그들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가시화하며 성 소수자를 지지하고, 혐오주의자를 고립시키는 모습을 잘 보여준 연설이다. 이것이 대항표현의 훌륭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017 대선 토론회의 한 장면에서는, 이러한 대화가 오갔다. "동성애에 반대합니까?" "그럼요" 대선 후보의 한 마디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수자 차별에 대한 인식은 더욱 더 심해지고, 동시에 소수자와 다수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정치인의 발언과 정책 하나가 '저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가 '저들을 반대한다' 가 되고, '저들을 박멸하자' 가 되는 것은 순간이다. 나치가 반인륜적 선동에 나섰을 때만 해도, 그들이 끼칠 해악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유대인을, 성 소수자를, 장애인을, 소수 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혐오를 아무리 법으로 규제하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법적 제재와 함께, '중립' 을 표방하며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 바로 대항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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