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의 인문학칼럼 11] 붉은악마 치우천왕의 숨겨진 진실

 중국은 2002년부터 고구려와 발해 등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박았다.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에도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태극전사를 응원하는 붉은악마의 상징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로 취급되고 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천왕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의 제14대 천왕으로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한다.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하는 병기 제작술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치우천왕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규원사화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학계에 의해 위서이며 판타지 소설이라고 평해진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당나라의 장수절이 주해한 책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이다' 라고 되어 있고, 같은 사기를 송나라의 배인이라는 인물이 주해한 책에 따르면 '치우는 옛 天子이다'라고 하여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동사강목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염제 신농, 황제, 치우천왕을 '중국의 세 조상'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달리 염황치 삼조라고도 한다. 1993년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치우천왕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

 

이처럼 중국은 동북공정부터 시작해 자국의 영토 내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자기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프로젝트들을 실행 중이다. 이처럼 중국이 일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정작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치우는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묘족의 조상으로 분명하게 되어 있다. 사실 치우를 한족의 시조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때문에 치우천왕은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고 그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엄연한 두 국가의 역사인데 중국은 자국의 역사적 사실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치우천왕을 중국의 역사로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는 고조선의 역사부터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를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 민족의 시조가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연구를 하며, 더 많은 증거를 찾아내는가에 따라 치우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또는 둘 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역사가 누구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서 양쪽의 공동 조상이며 우리의 조상인 치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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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일보 신상구 (2018)

NAVER 조의선 (2006)

 

신동아 박정학 (2003)

 

사회의 현실, 문제점, 소식들을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전달하는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은 학생입니다. 학생의 시각에서 인문학을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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