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문득 ‘승리’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승리'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나는 승리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일까? 내가 원하는 나는 '승리한 삶'을 살아가는 나일까? 그러던 중 우연히 글을 하나 읽고 이 시를 접하게 되었다. ‘승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어떤 사람은 나폴레옹을, 누군가는 독립운동가를, 또 다른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승전국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말을 들으면 먼지투성이가 되어 결국 정상에 오른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은 이런 ‘승리’에 관한 시를 하나 소개해볼까 한다. 이 시는 시인 박노해의 <고맙다 적들아>라는 시이다. 시인은 자기 적들에게, 상처에게, 고난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있어서 자신을 찾았고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난 이 시를 보며 ‘진정한 위너(winner)’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과거의 적들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몇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있었기에 승리라는 것은 더 값지게 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시험을 본다고 생각해보자.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받은 100점과, 공부를 열심히 하여 받은 100점 중, 무엇이
지금까지 학자들의 이야기, 대중들의 이야기, 교과서까지 기독교의 환경윤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다루었다. 모두 하나같이 답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정말로 인간 중심주의며, 나아가 인본주의의 특성이 있는 것일까? 그 전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던, 아니 어쩌면 기독교인, 기독교 학자들조차 오해했을 수 있는 대목을 말이다. ‘신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 신의 섭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파괴’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연을 수단으로 삼는다’라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또한 동시에 ‘자연을 그 자체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창조물 그대로 말이다. 또한 ‘자연’은 관리의 대상이라고 나타내는데 이 ‘관리’는 절대 지배가 아니다. 창세기 말씀과 복음서 등과 같은 성경에 보면 청지기가 나오는데, 청지기는 하나님의 소유물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지배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논란의 중심지에 섰던 창세기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
필자는 생활과 윤리를 공부 하고 있다. 항상 의문이 들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경윤리' 부분에 나오는 인간 중심 사상에는 항상 '기독교(그리스도교)'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권리를 주었다는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는 것은 같은 피조물들이 지배하고, 지배 당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게 자연을 '지배'할 정당성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건 '신'이 아닐까? 하는 궁금으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가장 광범위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환경’ 문제이다. 오랜 시간을 걸쳐 서서히 그 문제점이 한 둘씩 발견되어가며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도는 점차 커지고 있다. 환경 문제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점차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1 환경을 보호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런데도 점점 더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에는 많은 논쟁들이 생겼다. 다음은 논쟁 중 몇 가지를 간추려 온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는가?’ ‘환경 보호의 의미와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 적용되어야 하는가?’ ‘자연이 인간 행위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가?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제목과 표지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도대체 글자가 어떻게 아로새기는 것이고, 왜 스물 일곱가지의 세상인지 궁금했다. 이건 과연 소설일까, 철학책일까, 에세이일까, 이름은 왜 ‘글자 풍경’ 일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책 표지에 있는 저 토끼와 강아지도 글자인 건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나도 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란 이유는, 이 모든 게 표지만 보고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정말로 풍경에서 보는 글자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등 많은 대륙을 돌아다니며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처음 부분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글자 관련된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정말 놀랍게도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거의 다 사라졌는데 이 궁금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부분에서는 ‘유럽과 아시아의 글자풍경’이라는 소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홍콩을 다룬 부분이었다. 홍콩은 식민 지배를 오
현재 이 세계는 무슨 주의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이기주의’ 또는 ‘집단 이기주의’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용하는 신문이나 여러 플랫폼의 글에서는 이기주의에 대한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마땅히 도와주는 것이 정답이라고 느끼면서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모른척 하기에 바쁜 '나'를 보면서 놀라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질책했으면서도, 필자 본인이 그렇게 똑같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돋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이런 상황을 보며 필자가 떠올린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 그리고 화합과 조화를 배우며 자랐잖아?’ 앞선 생각에 따라, 다음은 필자가 포털 사이트에 ‘이기주의 심각’을 검색하여 나온 기사들이다. 뉴스 헤드라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집단 이기주의가 심각한 것을 볼 수 있다. 공동체와 조화는 우리가 초등학생 때 배우는 도덕 교과서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대표적인 사상인 불교, 유교, 도가는 모두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심지어는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도 조화를 추구할 것
‘엔칸토: 마법의 세계’, ‘씽’, ‘소울’ 그리고 ‘메이의 새빨간 비밀’까지, 이 디즈니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영화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영화의 공통점을 물론 디즈니가 요즘 어떤 메시지를 영화에 담고자 하는지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권선징악’이나 ‘백마 탄 왕자님’과 같은 이야기는 디즈니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소재가 되었다. 영화를 이전부터 꾸준하게 많이 본 사람이라면 지금 필자가 하는 말에 공감이 될 것이다. 디즈니는 이제 ‘나는 나야!’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는 디즈니뿐만이 아니다. “You and Me, Me and you, We are the same. 모두가 같아서 너도나도 없었어1” 다음은 한 학교의 학생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부분 중 한 부분을 발췌해 온 것이다. 가사의 전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모두 같은 세상에 있지만 개인은 모두 다르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빛나고 특별하며, 따라서 나를 표현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분이 필요하다. ‘개성’을 넘어서 이건 ‘나’를 사랑하는 ‘자존감’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웃음을 선물할게>, 제목만으로도 정말 설렜다. 어떤 웃음을 선물해줄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시작된 책 읽기였다. 이 책을 읽을 시점에 비문학을 자주 읽었었던 터라 문학책이 더 그리웠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직접 고른 책은 아니다. 필자가 다니는 새이레 기독학교에서는 1주에서 2주 동안 책을 정해 읽고 독후감을 쓴다. 그 때 읽은 책이다. 선생님은 이 책을 추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쾌한 웃음부터 가슴 찡한 웃음까지 다채롭게 담아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떤 방법을 통해 나에게 웃음을 가득 안겨줄지 말이다. 이 책은 지은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편 소설을 묶어서 만든 책이다. 작가만 무려 10명이 되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웃어도 괜찮아’였다. 발달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오빠는 기술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목공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세정(주인공)이의 오빠는 기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기술 고등학교인 만큼 기술을 배우고 회사에 먼저 들어가서 일을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꾸준히 일을 배우고 회사에도 나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하버드 글쓰기 강의’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20년간 글쓰기를 가르치며 바버라 베이그가 알려준 내용, 그리고 워크숍을 다니고 강의를 하며 발견한 사람들의 문제를 이 책에 담았다. 평소 필자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많이 해서 이 책은 더 끌리게 되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지, 더 보충해야 할 점은 어떤 건지를 알게 해 주는 책이라는 기대감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글쓰기를 하며 해서는 안 될 생각, 해야 하는 생각과 마음가짐 등을 알려준다. 이 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시작하는 법, 글쓰기의 기초 등을 알려주며 글쓰기를 낯설어하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글쓰기로 다가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중 하나가 ‘프리라이팅’이었다. 영어 그대로 ‘자유롭게 글을 쓴다’는 것이다. 문맥, 문장 구조, 어휘 등 글에 필요한 어떤 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생각나는 대로 그냥 써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생각을 늘리고 생각을 키워 나가는 게 ‘프리라이팅’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왜 글쓰기를 두려워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글을 ‘평가’ 받아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각자 개인이 쓴 글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어디서든 수없이 많이 들어 보았을 이야기일 것이다. 필자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인터넷을 통해서도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들었음에도 점점 내 기억 속에서 이 질문은 사라져갔다. 중학생이 되고 벌써 고등학생을 앞둔 나이, 필자는 이 질문을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필자가 다니는 새이레 기독학교에는 ‘영어 회화’시간이 있다. 이번에 영어 회화 시간에는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토론을 하고, 마지막에는 글을 써서 내 의견을 영어로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이다. 그러나 사실 의견을 적는 데에는 ‘돈으로 살 수 있다’가 훨씬 더 적기에는 편했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을 다 정리하여 작성하고 난 뒤에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라는 필자의 생각이 더욱더 확고해졌다. 통합사회 시간에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개념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사람이 일정한 소득을 넘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률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WHO는 전 세계적으로 자살의 79%가 중·저소득 국가에서
‘나쁜 과학자들’, 그리고 ‘생명 윤리가 사라진 인체 실험의 역사’라는 문구를 보며 생활과 윤리 시간에 배웠던 ‘뉘른베르크 강령’이 많이 생각났다. 생체 실험에 관한 강령이었는데 ‘세균부대’, ‘나치 수용소’도 같이 배웠었다. 이 책은 어떤 내용으로 나를 맞이해 줄지 설레기도 했지만 ‘또 얼마나 잔인한 내용이 들어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약간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역시나 유대인 수용소로 시작했다. 그런데 1부의 이름은 ‘인간 기니피그’였다. 제목만으로도 실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을 저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왜 하필 ‘기니피그’인지는 감이 잘 안 잡혔다. ‘인간 기니피그’라는 말은 나치 수용소에서 생존한 어떤 유대인이 그곳을 증언하며 ‘인간 기니피그’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731부대’에 대한 내용이었다. 일본이 만주에 설치한 세균부대로 세균으로 전쟁하는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구소이다. 사람들에게는 비밀리에 진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부대를 가장하여 ‘731부대’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실시되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생체 실험을 많이 당했는데, 나치 수용소에서 했던
#plasticstraw 라는 해시태그를 본 적이 있는가? 이 해시태그는 플라스틱 빨대로 인해 생기는 각종 오염과 특히 거북이를 비롯한 많은 동물이 죽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SNS에 올라온 #plasticstraw 해시태그다. 지금 캡처한 사진보다 더 많은 게시물이 존재한다. 우리는 플라스틱 빨대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빨대를 많이 만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종이 빨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플라스틱 빨대는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중 과연 몇 %를 차지하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플라스틱 빨대는 바다로 유입되는 전체 플라스틱 중 0.03%만 차지한다.그렇다면 바다거북은 개체 수가 크게 줄지 않는가? 그것은 아니다. 플라스틱 빨대 말고 진짜 이유가 존재한다. 몇백 마리의 거북이가 죽게 만드는 진짜 이유 말이다. 그 진짜 이유는 어업 활동 중 생기는 ‘혼획’이다. ‘혼획’이란 ‘어획 대상 종에 섞여서 다른 종류의 물고기가 함께 잡힘.’을 말한다.1이 혼획에는 원래 잡으려던 물고기 종이 아닌 다른 것이 같이 잡혀 올라오는 것인데 그 종에는 바다거북, 돌고래와 같은 멸종 위기종도 포함된다. 이런 ‘혼획’으
‘내 영혼이 따듯했던 날들’ 제목만 들어도 필자는 벌써 읽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만큼 이 책은 나에게 처음부터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어 한참을 빠져 읽었다. 비록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맨 앞부분과 뒷부분 밖에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책이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사라졌다. 내가 원래 보던 그 자리에서 책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틈틈이 찾아 읽던 그 책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읽을 기회가 생겼다. 필자가 다니는 ‘새이레 기독학교’ 에서는 2주에 한 번 도서를 선정해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데 그 책이 도서로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도서관에 있던 그 책은 제자리에 돌아왔다. 사실은 필자가 장소를 잘 못 찾은 것이었다. 이 책을 읽는 처음부터 굉장히 시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처음 부분에서 ‘반 쪽짜리 수박 같은 달’이라는 표현이나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들어 가고 있다’라는 등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표현이 들어가서 머릿속에 소설의 배경이 아주 정확히 떠오르게 했다. 책 분위기 자체가 서정적인 느낌이라서 ‘소설’이라기 보다 ‘아주 긴 시’라는 말이 더 적당할
‘이기주의’, ‘개인주의’ 현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모두가 많이 들어보았을 단어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점점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너는 너, 나는 나’인 개인주의로 변화되고 있다. 이전에 당연했던 말들과 행동은 점점 사라지고 어느샌가 ‘너’를 위해 한다는 핑계 하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꼬는 말들만 생겨났다. ‘틀딱’, ‘꼰대’와 같은 말들도 이와 같다. 그러나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심 어리게 해주는 말 또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일에 상관하지 말라며 말이다. 필자는 현재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미디어의 부정적인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 그러나 소통의 문제가 존재한다. 하루는 대형 백화점에서 길을 잃어 전화하기 위해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몇 명의 사람에게 찾아갔으나 돌아온 대답은 모두 “NO”였다. 물론 내가 어른스러워 보여 더 꺼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전까지도 흔쾌히 빌려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필자가 점점 더 개인주의가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공동체’가 기반인 나라다.
생활과 윤리 시간에 ‘덕윤리’를 배우면서 마이클 센델을 현대 학자로 배운 적이 있다. 현대 학자라고는 하지만 교과서에 나와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1800년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직도 살아있는 21세기 덕윤리 학자였다. 심지어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시는 멀쩡한 교수님이셨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정확히는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책도 쓰셨다. 이 책은 10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준다.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라고 하면 매우 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막상 대답하려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의 생명, 그리고 돈에 관한 정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특히 돈 중에서도 ‘세금’에 관련된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나도 세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세금 관련 학자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자유 지상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매년 백 억대의 돈을 버는 부자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은 돕기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하는게 맞을까?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자가 세
‘세계를 건너 너에게갈게’라는 이 제목만으로 이 책은 나를 이끌었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일반 도서이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줄거리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책 제목을 비롯하여 줄거리는 나에게 이 책에 대한 더 큰 기대감을 주었다. 이 책은 1980년대를 살아가는 은유와 2016년을 살아가는 은유가 서로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에서 가장 큰 특징은 오로지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처음 시작 또한 편지이다. 2016년 은유네 아빠는 은유에게 1년 뒤에 나오는 편지를 쓰자고 했고, 아빠의 처음 보는 어색한 모습에 화가 난 은유는 자신의 감정을 그 편지에 다 담았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생겼다. 그 편지가 1980년을 사는 10살 은유에게 간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그러나 1980년을 사는 은유는 2016년의 은유가 몇 주를 살 동안 3년, 많으면 10년을 산다. 그래서 그 둘은 언니 동생 사이에서, 친구가 되었다가 다시 동생 언니가 되고 나중에는 이모와 조카까지 나이 차이가 나게 된다. 알고 보니 이 둘은 엄마와 딸 사이였다. 그러나 이 둘은 2016년의 은유가 태어나는 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