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철학칼럼 14] 나의 아저씨가 불편하다는 사람들에게

진짜 어른이 되자는 진짜 교훈

지난 17,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끝났다. 주인공 간의 나이 차 때문에 처음부터 말이 많았던 드라마였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나온 기사를 봤을 때 나 역시 그 나이 차 때문에 -띠동갑까지의 차이는 괜찮지 않을까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가 되고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지켜보며 드라마 작가를 향해 있던 나의 반감은 어느새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드라마라는 생각에 나는 너무나도 쉽게 당연히도 ‘에로스'풀어낼 줄 알았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그러했기에. 제작진은 24살 차이의 로맨스가 아니냐는 비판에 이렇게 답했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얘기다’. 그러했다. 사랑이 아닌 연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인 어른들의 틈 사이에서 자라 어둠 밖에는 몰랐던 여자가 아홉살 소년의 순수성이 있고, 타성에 물들지 않은 날카로움도 있는어른을 만나 세상의 빛을 보고, 자신이 갇혀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연민, 사랑이라 일컫자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나의 아저씨>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여주인공(이지안)의 어릴 적 친구인 사채업자 이광일이 지안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고, 폭행을 당한 이지안이 상대에게 너 나 좋아하지?’라고 물었다는 것. 그리고 광일이 지안을 괴롭히는 이유가 지안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좋아해서 때린다라는 데이트 폭력 가해자의 논리를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던 장면이 2분이나 보여진 것은 잘못이다. 또 이 장면만 본다면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데이트 폭력 가해자의 논리처럼 보인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왜 지안에게서 너 나 좋아하지?’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알고 있냐는 것이다. 지안은 광일의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맞으면서 커왔고, 그런 지안을 도우며 광일은 좋아하는 감정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안이 자신을 때리는 광일의 아버지를 죽였고, 광일은 지안을 마냥 좋아할 수도 마냥 싫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애증의 관계 속에서 광일은 여전히 지안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폭력뿐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왜 하필 폭력을 통해 관심을 받으려 하냐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광일은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허구한 날 봐온 것이 폭력이다. 그가 학습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폭력인 것이다. 폭력이라는 방법은 잘못된 것이니 당연히 고치는 게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냐고? 그렇다면 난 당신에게 묻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못된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것이던가? 후천적 학습의 영향이란 매우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나 올바른 교육을 중시하는 것이다. 한 범죄자는 자신이 어릴 적에 선생님께 따뜻한 말을 한 마디라도 들어봤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광일은 지극히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지안 역시 광일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녀는 휴머니즘을 가진 아저씨를 만나 바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광일이 지안이 만난 아저씨(동훈) 만날 수 있었다면, 그 또한 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두 번째 주장은 드라마가 아저씨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주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뉴스를 보면, 주변의 아저씨들을 보면, 여성들의 몸매나 훑어대고 추잡한 성적 농담을 일삼고 성희롱하고 꼰대질을 하는 그들인데 어떻게 공포가 아닌 인간의 매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냐는 것이다. 묻겠다. 당신 주변에 있는 남자 어른이란 모두 성희롱을 하고 꼰대질을 하는 그런 어른이던가? 모든 사람들이 여성을 사람이 아닌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던가? 너무나도 명확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부분을 전체로 착각하여 판단함)’이다. 더욱이 <나의 아저씨>에 나온 모든 남자 어른들이 지안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지안을 보살핀 사람도 아저씨들이었지만, 지안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역시 아저씨들이었다. 작가는 모든 아저씨가 따뜻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이 사회에 동훈처럼 휴머니즘을 가진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 그러니 그를 보고 우리도 우리가 갖고 있던 인간애를 다시 꺼내어들자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단지 지안에게 그 인간애를 보여준 사람이 동훈이라는 아저씨였을 뿐이다.

 

모든 드라마는 사랑을 기반으로 짜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나의 아저씨>의 사랑은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였다. <나의 아저씨>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맥락을 모두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에로스를 떠올리며 너무나도 큰 나이차에 거부감만 들었을 뿐, 정작 상자를 열어볼 호기심은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지적은 모두 맥락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10대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요즘, 동훈과 같은 진짜 어른을 찾기가 힘들다. 물질주의적인 세상에 어느새 어른들도 아이들도 필자인 나조차도 이기심만 챙길 뿐, 연민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그런 어른이 되기로. 내가 그런 인간애와 연민과 휴머니즘을 갖고 있는 어른이 되어서,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로. <나의 아저씨>는 나에게 이것을 가르쳤다. 모든 아저씨는 위험하지 않다는 교훈이 아닌, 진짜 어른이 되자는 교훈을.

 

칼럼 소개 : 철학은 우리에게 낯선 학문이 아닙니다. 한 가지 논제에 수많은 가치와 관점을 담을 수 있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흥미로운 학문이며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한 학문입니다. 칼럼을 통해 쉽고 재미있는 철학으로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