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의 역사문화칼럼 6] 죽은 한국인의 삼베 수의

일본이 정해 준 한국의 삼베 수의

 

 

현재 망자가 입는 수의, 삼베는 언제부터 입게 된 것일까?

 

수의란 죽어 시체가 되어 입는 옷이기는 하지만 부모가 오래 살라는 뜻이 포함된 옷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부모 역시 생전에 준비하는 수의를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고 오히려 임종 후에 좋은 옷을 입고 묻힐 수 있음을 기뻐했다.

 

수의를 준비할 때면 마을 사람이나 친척 중에 바느질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모여 정성껏 수의를 만들었는데 이 수의를 짓는데 참여한 사람들은 수의를 바느질함이 복을 짓는 것이라며 기꺼워했고 수의를 마련하는 집에서는 이들에게 평소의 바느질삯보다 후한 삯을 지불했다고 한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는 유교사상 속에서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 역시 비단 등으로 수의를 마련해 부모의 시신을 감싸는 것을 로 여겼으며 고인이 생전 가장 좋아하던 옷, 혹은 가장 좋은 비단옷을 입혀 보내주고 부모를 여읜 자식은 죄인이라는 의미로 걷기만 해도 상처가 나는 거친 삼베옷을 상복으로 입던 것이 한국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문화통치를 기점으로 전통 비단 수의 대신 죄인등이 입던 삼베 수의로 상례문화가 격하 왜곡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수탈기관인 조선 총독부 소속 직원 김 숙당 (한국 최초의 재봉교재인 조선재봉전서의저자)를 내세워 삼베 수의를 의례준칙(1934)’에 담아 공포하며 조선 사회 내 정착, 확산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조선의 생활양식이 *번문욕례 하다(*지나치게 번거롭고 까다롭다)

수의는 포목 등으로 하고 고가의 실크는 사용치 말 것

상주는 *굴건제복을 생략하고 두루마기와 두건을 입을 것(*상주가 쓰는 굴건과 제복. 굴건은 두건 위에 덧쓰는 건)

왼쪽 가슴에 리본을 다고 왼쪽 팔에 완장을 달 것등등...

 

 

 

 

 

 

그밖에도 상여에 달았던 종이꽃 수파련과 흰 병풍 대신 일본 왕실의 상징 흰 국화꽃 장식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뒷산과 논밭 등 언제든 눈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던 가족묘 대신 더 많은 조선 땅을 수탈하기 위해 공동묘지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 총독부는 공무원 조직은 물론 각종 단체, 강연회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의례준칙뿌리내리기에 나서는데, 겉으로는 구태의 개선을 내세워 조선인의 궁핍한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선전했지만 본격적인 전시체제를 앞두고 있었던 일제는 절약한 물자를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국방비로 헌납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 삼베 수의를 보편화해 식민지 조선인들의 정신을 피폐화시키고 삼베 수의를 확산시켜 얻은 잉여 자산과 물자를 수탈하기 위한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 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 최연우 단국대 전통의상학과 교수)

 

우리나라 고유의 특성을 말살하고 정신적인 면까지 철저히 일본의 지배 밑에 두고자 했던 일제에 의해 우리의 장례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고인을 배웅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던 한국의 전통적 장례가 형식적이고 간소화 된 시신의 수습으로, 한국 고유의 흰색 여자상복이 일본식의 검정상복으로 바뀌며 변질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전통으로 둔갑한 일본의 장례문화를 따라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이 왜곡 되어져 버린 것도 모른 채 우리의 것인 양 무비판적으로 행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모르고 행하는 무지한 행동들을 밝혀내어 이를 바로 잡아 알려야 함이 우리가 맞닥뜨린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광복 72주년

 

안중근의 사형선고를 들은 어머니는 밤새 명주로 수의를 만들어 편지 한통과 함께 보냈다.

 

종군 위안부출신 할머니들께서도 삼베 수의를 입고 마지막 길을 가셨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에 어떤 옷을 입고 가야할까?

 

 

   

 

 

칼럼소개: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을 찾아  칼럼을 통해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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