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철학칼럼 9] 찬연히 빛났어야 할 故마광수 교수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그의 작품들은 1990년대,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20179, 한 교수가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시인 윤동주의 부끄러움을 세상에 알리며 천재성을 발휘하고 1984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한국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비판하고 풍자한 사람. 1991년에 출판한 <즐거운 사라>의 외설 논란으로 도주 우려가 없음에도 강의 도중 구속된, 사회가 자신의 문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세상을 떠난 교수. 마광수 교수이다.

   

마광수 교수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1989년 출판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세상에 충격을 준 고인에 대해 '교수품위 시비' 논란이 일었고, 국문과 교수회의는 마광수 교수의 2학기 전공과목 폐강조치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을 지지 또는 반박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앞에 나란히 붙었다. 3년 후 마 교수는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고, '음란물제작 유포' 혐의로 대학 강의실에서 강의하던 중 긴급 체포된다.

 

 

 

마광수 교수는 <즐거운 사라>등의 작품이 외설스럽다 하여 법정에까지 갔던 논란의 주인공이었다. 엄숙주의와 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비난과 편견에 시달려온 그는 결국 세상을 견디지 못한 채 2017년 9월 5일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 이후, 세간의 관심이 그에게 행해졌던 폭력적인 억압에 눈을 돌렸다. 과연 교수가 썼다는 그 외설적인 책 때문에 그를 욕할 수 있는 것인가? 그전에 책을 ‘외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마광수 교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문학이 외설로 묻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에로티시즘은 그의 문예적 사조였고, 쾌락과 유미주의는 그가 추구한 삶의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문학 작품인 소설에 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것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멀지 않은 과거 1990년대의 현실이 아니었는지. 1990년대에 사회적 억압으로 고통받던 마광수 교수의 죽음은 2017년의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즐거운 사라>, 마광수 교수를 겨냥한 법적 잣대는 표현의 자유의 억압이 아니었는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_On Liberty>는 그 답을 제공하고 있다.

 

 

 

밀이 제시한 표현의 자유를 잘 드러내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가령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의견인데, 단 한 사람만이 그것에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한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한 사람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인류를 침묵하게 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같은 것이다. …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생기는 해악은 그것이 전 인류에게서 ‘행복’을 빼앗는다는 점에 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그는 소수의 개별성을 강화해야만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신적으로 우월한 능력이 있는 소수에게만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밀은 유럽이 계급이나 민족과 같은 다양성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았고, 홈볼트라는 철학자도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 인간발전의 필수조건이라고 보았다.

 

밀은 여론의 위험성에 주목하였다. 여론이 한 사회에서 너무나도 강력할 경우, 그것은 소수의 등장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버리며 이 때문에 사회의 발전이 저지되며 자유 또한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론은 개인에게 전체 사회와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강요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자유의 보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밀은 사회가 개인을 얼마나 간섭할 수 있는지 그 범위를 자유론에서 명시하기도 하였다. 개인은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책임이 있었고, 사회는 ①개인의 특정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되고, ②개인이 사회·사회 구성원의 보호를 위한 노동·희생에서 자기 몫을 감당하도록 강제할 수 있었다. 당사자끼리의 문제에서 한 개인이 내린 결정에 대해 사회가 간섭할 때에는 반드시 그 결정이 잘못된 가정 위에서 내려졌을 때만 가능하였고, 개인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반드시 존중해주어야 했으며 이때는 개인의 권리가 제한이 가능했다. 사회가 개인적 행동을 과도하게 간섭할 때에 간섭이 잘못된 곳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밀은 사회의 지나친 간섭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밀의 사상을 토대로 故 마광수 교수를 보면 그에게만 적용된 법적 잣대는 분명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먼저 과연 그의 문학이 사회의 간섭이 필요한 수준이었는지를 본다면, <즐거운 사라>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으며 교수가 내린 결정은 잘못된 가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도 않았다. 에로티시즘을 내세우는 문학적 사조를 잘못된 가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분명히 1990년대 당시에 <즐거운 사라>와 마광수 교수를 사회적으로 사냥한 잣대는 ‘억압’이었다. 사회의 분위기가 책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벌을 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이것이 바로 밀이 우려하던 강력한 여론이라는 자유의 장애물이었다.

 

마광수 교수는 지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는 시인 윤동주에 관한 거의 모든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는 지난 1983년 윤동주의 작품 전편을 분석하면서 그의 시 저변에 가라앉은 '부끄러움'의 정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마치 시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분석이었다.

 

사회의 매도는 마광수라는 한 시대의 천재를 죽였다. 그는 스스로의 목을 매었으나, 결국 그 밧줄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것이었다. 외설적인 책을 썼다고 교수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고 학생들 앞에서 강제 연행된 그를 죽인 것은 사회였다. 

 

과연 우리가 마광수 교수 한 명만을 죽였겠는가? 단연코 사회는 몇백, 몇천을 죽였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 소수를 거부하는 사회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들의 안타까움 죽음이 밝혀지면 사회는 자책한다. 왜 그때 그렇게 그들을 비판하고 매도했겠느냐는 의문을 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특히 대한민국의 사회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여 새로운 이념 혹은 주장의 등장을 눈엣가시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게이·레즈비언·트렌스젠더·양성애자·페미니스트 등 우리 사회에 수많은 소수가 등장하여 억압을 받다가 서서히 사회 속 한 부류로 정착해가고 인정받고 있다. 마광수 교수 역시 그러했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란, 자유 그 자체란, 귀중하여 감히 누군가에게 양도할 수 없는 그런 권리이다. 그리고 사회는 그 권리를 지켜줄 책임이 있다. 또다시 시대의 천재를, 고마운 인재를 여론의 뭇매로 죽일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 발전에 있어 필요하고 보장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 권리이고, 우리 사회는 다시는 그것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해서는 안 된다. 밀과 홈볼트의 주장처럼 다양성이 인간 발전의 필수조건이고 우리는 그 필수조건을 지켜야만 하며, 이를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의 간섭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칼럼 소개 : 철학은 우리에게 낯선 학문이 아닙니다. 한 가지 논제에 수많은 가치와 관점을 담을 수 있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흥미로운 학문이며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한 학문입니다. 칼럼을 통해 쉽고 재미있는 철학으로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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